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가을이 왔다.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고 또 떠나가는 절기다. 춘보용철(春菩鎔鐵) 추자파석(秋子破石)이라 했다. 봄 여인은 무쇠를 녹이고, 가을 남자는 바위를 뚫는다. 봄 여인 가을 선비라는 점잖은 표현도 쓴다. 무르익는 가을만큼 우리들의 사랑도 깊어지면 좋겠다. 이런 계절에 잘 어울리는 노래가 패티김의 목청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이다. 이 노래는 제목이 여러 개로 불린다.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등. 사랑은 떠나가도 가을은 남는다. 가을은 겉으로는 마르고 시들어도 속으로는 오히려 영근다. 이렇게 영근 가을은 새봄에 다시 깨어나, 마르고 시든 뿌리와 가지에서 새순을 돋아나게 한다. 하지만 한 번 떠나간 사랑이 다시 오기는 쉽지 않다. 사람과 절기의 차이다. 누가 가을을 남기고 떠났는가. 사랑을 남겨두고 떠나가는가. 갈잎 서걱거리는 마른 날에, 마흔다섯 가을을 닮은 여인 김혜자(패티김의 본명)를 남겨두고 떠나간 그 사람은 누구였던가. 1983년 패티를 남겨두고 떠나간 사람은? 사랑할수록 깊어가는 슬픔,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 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 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흘러가리// 아~ 그대 곁에 잠들고 싶어라/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눈물로 쓰여진 그 편지는/ 눈물로 다시 지우렵니다/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내 사랑 꽃이 되고 싶어라.(가사 전문)

노랫말의 행간에 누군가 숨어 있는 듯하다. 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 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된다. 오죽하면 날개를 접고 그대 곁에 잠들고 싶은 새가 되려고 했을까. 이 노래 속에서 가을을 남기고 떠나간 사람은 당시 56세 본명 최치정, 길옥윤이다. 그는 1927년 영변에서 출생하였으며, 작곡가와 색소폰 연주자로서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음악의 거장(巨匠)이다. 그는 식민시대와 해방정국,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양 대중음악이 무차별적으로 밀려들어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우리 정서를 가진 음악으로 발전시킨 대중 음악가로서 국민들에게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경성치과전문학교(서울대 치대)를 졸업한 후 재즈에 심취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음악클럽을 전전하다가 8·15해방 직후 박춘석·노명석과 그룹 핫팝을 만들어 미군 부대에서 색소폰을 연주했다. 1962년에는 데뷔곡 <내 사랑아>를 현인이 불러 히트시켰는데, 그 해 가수 패티김을 만나면서 그의 음악 인생은 전기를 맞았다. <4월이 가면>, <사랑하는 마리아>, <서울의 찬가> 등 그가 작곡한 수많은 곡을 패티김이 불렀고, 1966년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그들의 로맨스도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둘은 1973년 이혼을 한다. 이후 길옥윤의 활동은 침체되었으나, 1976년 신인가수 혜은이(제주출신, 본명 김승주)를 발굴해 <당신은 모르실거야>로 재기하여 그녀를 통해 <제3한강교>(한남대교), <감수광> 등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했다. 1980년 28세 연하 전연란과 재혼한 그는 서울올림픽대회 폐회식 음악(아침의 나라에서, 박건호 작곡, 김연자 노래)을 작곡하고, 1988년 음악 카페 창고를 운영하다가 빚을 지고는 달아나듯 일본으로 간다. 하지만 그는 1994년 폐암 선고를 받고 그해 6월 귀국하였고, 1995년 3월 향년 68세로 작고하였다.

<가을 남기고 떠난 사람>을 열창한 패티김은 1938년 서울 출생, 중앙여고를 졸업하고 21세이던 1958년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가수 이해연의 남편 베니김(본명 김영순)의 추천으로 린다김이란 예명으로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하였다. 이후 미국 가수 패티 패이지의 이름을 본 따, 김혜자에서 패티김으로 예명을 바꾸고 활동을 한다. 그녀는 1962년 우리나라 최초로 리사이틀 공연을 하였고, 1971년 디너쇼도 시도한다. 이후 일본·동남아·미국 등 서구로 진출하며, 미국 카네기홀과 호주 오페라하우스 공연을 하는 등 원조 한류이다. 1978년에는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대강당에서 <패티김 리사이틀, 서울의 연가>를 공연했으며, 1989년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였다. 그녀는 2012년 생년 74세, 가수 생활 54년을 결산하는 <이별>을 전국 16개 지역에 순회공연 한 후 2013년 가수생활을 공식 마감했다. 패티김은 남편 길옥윤(1927~1995)과의 사이에 정아, 이태리계 남편(아바라도 게디니, 1976년 재혼)과의 사이에 카밀라 게디니가 있으며, 그녀의 대표곡 <이별>은 북한 김정일의 애창곡이라는 풍문이 있다. 또한 패티김을 사랑한 예술가, 가요계의 큰 별 작곡가 박춘석은 패티김의 본 남편 길옥윤과 연정의 라이벌(?)이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 패티김은 박춘석의 가사와 곡을 유독 많이 불렀다. 박춘석은 경기고 1학년 때 명동의 클럽에서 피아노연주자로 데뷔하였다. 1949년 서울대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하였으나, 1950년 신흥대학(경희대)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하였다. 그는 1950년대 이후 40여 년간 대중음악계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가 사랑하는 패티를 남겨두고 먼저 먼 길을 떠났다.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노래도 박춘석 작사 작곡인데, 이 곡은 박춘석이 예감한 자화상 같은 이별 곡은 아닐는지...

가을은 마음속의 빈 원고지다. 그 텅 빈 마음의 눈금 안에 하나하나의 사랑 서정을 채워갈 때 비로소 가을은 완성된다. 다람쥐와 알밤이 그러하고, 기러기가 그러하고, 하이얀 억새꽃과 붉은 단풍과 파아란 하늘이 가을이다. 패티김에게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길옥윤, 최치정처럼. 방랑시인 바람벽 같은 길삿갓 길옥윤이 떠나간 사람이고 패티김이 홀로 남은 계절이다.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우수(憂愁)에 잠긴다. 울긋불긋한 색깔이 자꾸 말을 걸어오면 고향을 생각하고 옛사랑을 생각한다. 당나라 시인 장적(張籍, 767~830)은 이런 가을을 <추사>(秋思)라는 시로 음유했다. ‘낙양성에 건 듯 가을바람이 불어와/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쓰려니/ 생각은 천 가지 만 가지/ 행여 바삐 쓰느라/ 할 말 다 못 하였나 걱정되어/ 인편 떠날 무렵/ 봉투를 다시 뜯네.’이런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머리를 수그리고 고향을 생각한다. 대중들 앞에서 열광적인 절창을 한 저녁나절, 홀로 옛사랑 생각에 가슴 조린 패티김처럼.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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