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공자(BC551~379)가 남긴 시경(詩經) 속의 311편 시를 읽으면서 대중들은 시와 노래 중에서 시가 먼저였으리란 생각을 한다. 하지만 노래가 먼저였음을 기억하시라. 시경 속의 시들은 공자가 그 시절 천하를 주유시킨 민중 노래 수집가 행인(行人)들이 수집해 온 3천여 수의 구전 민중노래 중에서 취사선택한 것. 이를 풍·아·송·부·비·흥(風·雅·頌·賦·比·興)으로 구분 지었다. 앞의 풍아송은 노래로 불려진 시(노랫말)의 내용상 구분이고, 뒤의 부비흥은 형식적인 구분이다. 이것이 시의 여섯 가지 뜻이란 말, 시지육의(詩之六義)다.

우리 대중가요 100년사에서 시경과 대칭되도록 시를 노래로 얽은 시기는 1956년이다. 그해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인 노래다. 뒤이어 1958년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 손석우가 곡을 붙여서 박재란이 불렀다. 이후 여러 시 노래가 불리고, 1983년 송창식의 목청에 미당 서정주의 <푸르른 날>이 매달린다. 이 노래는 미당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1948년, 시집 귀촉도에 발표)에 송창식이 곡을 붙였으며, 1983년 제1회 KBS 작사 대상을 받았다. 기존의 시에 곡을 붙였는데, 작사 상이었다니? 요해(了解)가 쉽지 않다. 노래 속의 화자는 깊은 가을을 마주하고 앉아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옛사랑을 그리워하며, 봄·여름·가을·겨울과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사랑의 상념에 빠져 있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서 단풍 물드는데...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가사 전문)

<푸르른 날> 노래를 발표할 당시 서정주는 68세, 송창식 36세였다. 서정주는 1915년 고창 출생, 2000년 향년 85세로 작고한 생명파 시인. 호는 미당(未堂)·궁발(窮髮)이고, 부안에서 자랐다. 그는 1933년 개운사 대원암 박한영 스님 밑에서 수학 한 후 1936년 경성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등단했다. 1936년 김광균·김동리·오장환과 시인부락 동호인 활동을 하였고,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기 때,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하고 일본의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찬양과 조선인들의 참전을 독려하는 작품 활동을 하는 등 친일이력을 가지고 있다. 해방 후에는 우익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익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섰으며, 이후 서라벌예대와 동국대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주요작품으로 <화사집>·<귀촉도>·<신라초>·<국화 옆에서> 등이 있다. 서울 관악구에 시인의 고택이 남아있으며, 그의 행적과 문학 활동에 대하여 많은 설이 따라다닌다.

미당의 <푸르른 날>이 봄‧여름‧가을‧겨울을 관통하는 4계절 시라면, <국화 옆에서>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다. 1947년 11월 9일,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던 이 시에 유행가를 멜로딩하는 선율을 얽으면 어떤 감흥일까. 훼날레 절기를 가을에 맞춘 곡조.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송창식은 1947년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6.25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3년 뒤에는 어머니와도 헤어져야 했다. 그는 부모 없이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음악을 좋아했고, 6학년 때 인천여상 강당에서 오케스트라를 보고 나서 가수의 꿈을 가졌다. 그 꿈 덕분에 인천중학교 대표로 음악콩쿠르에 참가하여 1등도 하였다. 그는 서울예고에 지휘자 금난새(1947~)와 동기동창으로 성악과에 입학하였으나, 중간에 학교를 그만둔다. 그가 세시봉 무대에 서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까 숙명이었을까. 송창식은 친구가 다니던 홍익대에서 노래하다가 우연히 이상벽(1947~. 황해 옹진 출생)의 눈에 들어 세시봉에서 윤형주를 만난다. 이렇게 1967년에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70년에 솔로로 데뷔면서 청년 감성을 관통하는 <고래사냥>을 포효했고, <피리 부는 사나이>와 <왜불러>처럼 1970년대 중반을 상징하는 애창곡들을 불렀다. 그의 노래는 가사도 시대 이념을 혼융하고 있지만, 절규하듯 내어 지르는 목소리의 울림은 듣는 이들의 막막한 가슴을 훌훌 털어내 준다.

쎄시봉(C'est Si Bon)은 1947년 앙드레 오르네즈가 작사하고 앙리 베티가 작곡한 프랑스의 샹송인데, 1950년에 제리 시렌이 영어 가사를 써서 <It's So Good> 타이틀의 노래가 되었다. 이를 본 딴 쎄시봉은 1953년 무교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이다. 이후 1963년에 서린동으로 옮겼다가 1969년 문을 닫은 것이 원조이며,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부지기수로 늘어난 음악감상실이 이를 본 딴 것이다. 이곳에서는 커피 한 잔 값으로 하루 종일 앉아서 팝송·샹송·칸초네를 즐길 수 있었다.

송창식하면 특이한 개량한복(改良韓服)이 떠오른다. 부인 한성숙이 한복 연구가라는 말까지 덧붙는다. 부인이 한복 전문가는 아니다. 그는 1984년경부터 개량한복을 입는데, 그 동기는 1976년 홍콩 아마추어 가요제 참석 때 입은 한복 덕분이다. 그때 송창식 스스로의 눈에 비친 첫날의 양복은 후줄근하고, 둘째 날 입은 한복은 최고로 멋져 보였단다. 이후 스스로 복제 공부를 하고, 1977년 결혼 후 부인에게 연구를 맡겼다. 이후 부인이 송창식의 옷본을 만들었는데, 그 옷본을 이태원 한복 프로들에게 가져갔다가 퇴짜를 맞는다. 그렇게는 만들 수 없다는 말을 들은 후, 김도향(1945~)이 소개한 보광동 세탁소 아주머니에게 맡겨서 만들기 시작한 한복이 100벌이 넘는단다. 도처상수(到處上手), 전문 프로 위에 실용 프로가 있음이다.

우리 대중가요사에 시가 노래가 된 예는 많다. <세월이 가면>은 1956년 명동에 있는 동방살롱 맞은편 빈대떡집에서 박인환이 시를 쓰고, 이진섭이 즉석 곡을 붙여, 그 자리에 있던 임만섭이 처음 불렀단다. 음반으로는 그해 나애심의 목소리로 신신레코드에서 처음 나왔다. 이후 1959년 현인, 1968년 현미, 1972년 조용필이 불렀고, 1976년 박인희가 히트시키면서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박인환은 이 시를 쓴 1956년 3월 17일, 시인 이상(李葙) 추모행사를 하며 3일간 연속 과음을 한 후유증으로 3월 20일 31세로 요절했다. 심장마비였다. 인생은 유한하고 예술은 영원하다. 노래가 된 시를 펼쳐보자. <부모>(유주용). <세노야>(양희은). <개여울>(정미조). <세상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순아!>(최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실버들>(희자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유심초). <향수>(이동원/박인수). <우리가 어느 별에서>(안치환). 이 외에도 <그리운 금강산>, <기다리는 마음>, <그대 있음에>, <산 너머 남촌에는>, <등대지기>, <섬집 아기> 등도 있다.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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