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행가는 역사다. 노래가 탄생한 시대의 곡절을 아물고 있는 보물이다. 1곡 7재(一曲 七材)가 기승전결로 얽히거나, 모티브로 노랫말이나 가락의 행간에 꼼실거리고 있다. 작사·작곡·가수·시대·사연·사람·모티브 등을 가감하는 작품자들의 조탁옥조(彫琢玉藻) 고뇌와 숙고의 산물이다. 이런 절창이 1973년 오디오형 국민 가수 나훈아의 목소리를 타고 세상에 나온 <물레방아 도는데>이다. 작사가 정두수의 삼촌 실제 이야기가 모티브였다.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새봄이 오기 전에 잊어버렸나/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두 손을 마주 잡고 아쉬워하며/ 골목길을 돌아설 때 손을 흔들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 천리타향 멀리 가더니/ 가을이 다 가도록 소식도 없네/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가사 전문)

이 곡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이 도화선이 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전사하여 한 줌의 재(災)로 고향에 돌아온 한 청년의 한을 품은 노래다. 배경지는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작사가 정두수(1937~2016)의 고향이다. 1944년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태평양전쟁에서 최후 발악을 하며 우리 형제들을 강제로 사지(死地)로 내몰았다. 그 후 1년여 뒤에 패망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31년 차, 그 당시 19세이던 정두수의 삼촌은 와세다대학에 다니다가 강제 징집되어, 사랑하는 어머니와 고향마을 순이의 손을 놓고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를 떠나게 된 것이다. 그때 삼촌은 고향 마을 어귀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가며, 어머니와 순이를 돌아보고, 또 한 번 뒤돌아보며, 이별의 길을 나섰다. 이를 바라보던 정두수의 나이는 8살,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지은 노래가 <물레방아 도는데>이다. 어릴 적 기억은 더 오래간다. 이효석(1907~1942)이 30세 무렵 지은 단편소설 《매밀꽃 필무렵》스토리가 평창군 봉평에서 지내던 9세경 소년 이효석의 기억 속 실제 이야기인 것과 같다. 이효석은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1917~2003)을 사랑했던 남정네다. 노래하는 기생꽃이 아니라, 한 인격체로서의 이성적인 사랑.

태평양전쟁에 징병되어 일본제국주의 관동군 소위로 복무하던 정두수의 삼촌은 이듬해이던 1945년, 한 줌의 유골(遺骨)로 고향에 돌아온다. 20살을 일기(一期)로 전쟁터에서, 우리나라를 지배한 남의 나라(일본) 군인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정두수는 그때 강제 징용되어 떠나가던 삼촌을 생각하며, 이 노랫말을 작사했단다. 이 애절한 사연에 박춘석이 곡을 입히고 26세이던 나훈아가 민족의 울분 같은 노래로 설토(說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9.1.~1945.9.2.(항복 서명한 날)까지 치른,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피해를 남긴 전쟁이다. 이 전쟁은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 본토 히로시마(우랴늄탄, u-235)와 나가사키(플로토늄탄, p-239) 상공에 투하된 미국의 원자폭탄 앞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천황제를 포함한)하면서 끝났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본 124대 천황의 항복선언 라디오 연설 발표다. 전사자는 약 2500만여 명, 민간인 희생자도 3000만여 명에 달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이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나라 국민을 강제 동원했다.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였고, 1939년 이에 기초하여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여 마을 단위까지 총동원연맹을 만들었다. 또한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조선인에게도 확대 적용하였는데, 이때 강제 징용된 정두수의 삼촌이 이 노래의 주인공이다.

지금은 하동군 성전면 성평리에 징검다리와 물레방아는 없어졌지만, 마을 여러 곳에는 돌담길이 남아 있고, 물레방아와 징검다리는 배다리공원에 <물레방아 도는데> 노래비로 복원되어 있다. 가을이면 주교천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코스모스와 조롱박터널, 칸나 등이 조화를 이루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또 사로잡는다. 노래 속 징검다리를 건너간 하천이 주교천(舟橋川)이다. 주교천은 이명산에서 발원하여 섬진강으로 흐르는데, 섬진강의 제일 아래에 있는 지천이다. 이 개천에 서 보면 돌담길을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본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줄을 당기면서 강의 이쪽저쪽을 오가던 배다리의 모습도 아련하다.

<물레방아 도는데> 작사가 삼포 정두수(본명 정두채)가 고향을 묘사한 노랫말은 60여 곡, 하동 군민 인기투표 때는 항상 그가 1위를 차지했단다. 그는 1937년 성평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산 동래고를 거쳐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61년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 공모한 문예작품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대중가요 노랫말을 발표하면서 시인보다는 작사가로 더 많이 활동하였다. 2009년 발간한 그의 시집 《하동포구 이야기》는 그의 고향 사랑 증표다. 정두수 노래비는 전국에 12곳이나 된다. 하동에 <물레방아 도는데>와 <하동포구 아가씨>, 서귀포에 <서귀포 바닷가>, 흑산도에 <흑산도 아가씨>, 마포에 <마포종점> 등등. 영원한 노래시인 정두수는 2016년 향년 79세로 하늘나라 별이 되었다. 그가 이승에 남긴 많은 노래시는 대중들의 가슴속에서 오늘도 반짝거린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겸비한 빛을 반짝거리는 예술의 별로.

<물레방아 도는데> 원곡 가수 나훈아는 본명 최홍기, 1947년 부산 초량동(草梁洞)에서 무역상을 하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초량은 왜군들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 박살이 난 좁은 바다 물길이다. 영도와 남포동을 있는 영도다리가 있는 곳. <굳세어라 금순아> 노랫말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최홍기는 1965년 가수의 꿈을 안고 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서라벌고등학교 진학하였으며, 오아시스 레코드의 직원으로 가요계 생활을 시작해서 1966년 <천리길>로 데뷔하여 2021년 <테스 형!>을 절창하는 국민가수가 되었다.

나훈아는 결혼을 세 번 하고, 이혼을 세 번 하였다. 1973년 고은아의 4촌 이숙희와 결혼하여 2년 후 이혼하였으며, 1976년 7세 연상의 김지미와 결혼하였으며, 이때가 나훈아는 두 번째 김지미는 세 번째였다. 김지미는 최고의 주가로 인기 절정일 때, 결혼식도 하지 않고 나훈아와의 동거를 선언하여 연예계를 뒤집었지만, 1982년 이혼하면서, 나훈아는 ‘김지미는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여인’으로, 김지미는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고 서로를 부추겼다. 그리고 1년 뒤 나훈아는 또 아빠가 됐다는 폭탄을 선언한다. 14세 연하 가수 정수경과의 사이에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이들은 1985년에 결혼식을 올렸으며, 2010년 전후로 불화파경설이 나돌았고, 2016년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의 판결로 법정 이혼했다.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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