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바보들의 행진> 영화를 떠올리면, 주인공 병태(김수철)과 춘자(이미숙)·민우(안성기)가 기억 속에서 팔락거린다. <고래사냥> 영화를 떠올리면, 병태(윤문섭)과 영자(이영옥)의 이야기가 귓가에 재랑거린다. 우정과 애정을 넘나들든 그들의 대화 속으로 녹아들 듯하던 노래가 송창식의 목소리 <고래사냥>이다. 청생통(청바지·생맥주·통기타)의 묵시적 일체감으로 권위에 저항하던 젊은이들의 목구멍에 핏대를 세우게 했던 떼창.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잡으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우리들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우리들 가슴속에는 뚜렷이 있다/ 한 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가사 전문)

노랫말 행간에 젊은이들 한숨이 눅눅하고 절절하게 배어있다. 그 당시는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었다. 해피스모그 대마초사건(1975.12.3)의 불바람이 일어나기 전, 긴급조치의 찬 서리가 서걱거리는 마른 이파리에 하얗게 맺혀있었다. 그 시절 노래 속의 고래는 젊은이들이 찾고 싶었던 그 시대의 희망이다. 그들이 오늘날의 7080이다. 그 고래는 40여 년 넘게 지난 지금의 젊은이들도 애타게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태백(이십 대 태반이 백수)이니, 이혼남(이십 대 혼자 노는 남자)이니 하는 속어들이 횡횡거리며 우리 곁에 지속되고 있으니 안타까움이 더한다. 혼술·혼밥처럼 새로 생겨난 말들의 의미는 어떻게 되새김해야 하나. 암울했던 그 시대, 청춘들이 타기를 갈망했던 그 삼등열차, 지금은 KTX라도 타고 가서 그 희망의 고래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시절 태백 스위치백 레일 시스템에서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며 동해 바다를 지향했던 삼등 기차는 이제 고속열차 레일 위를 달린다. 10시간이 걸리던 것이 1시간 30분이면 달려가 푸른 바닷물결을 마주할 수가 있다. <고래사냥> 노래는 영화 <별들의 고향> 주제가를 위하여 최인호(1945~2013)가 노랫말을 쓰고 28세 송창식이 곡을 엮어서 부른 시대 절창이다. 고래는 희망의 상징이고, 사냥은 꿈을 향한 도전이었다.

소설가 최인호는 1945년 10월 해방광복 1개월여 뒤에 서울에서 태어난 해방둥이, 2013년 향년 67세로 소설같인 인생을 살다가 간 별이다. 서울과와 연세대 영문과를 거친 달필가(達筆家)였다. 서울고(16회) 2학년 재학 시절인 1962년 단편 《벽구멍으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하였고, 1967년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월간 샘터에 소설 《가족》을 연재하면서, 자신의 가톨릭교회 신앙과 가족들 이야기를 썼다. 이 소설은 대한민국 문학계의 최장 연재소설이다. 2010년 2월호를 기해 이 연재는 종료되었다. 최인호의 암(침샘) 투병으로 인한 절필. 1975년 9월부터 2009년 10월호까지 34년 6개월간 총 402회를 연재했다. 글쟁이가 펜을 놓는 것은 죽음에 이른 것이다. 그의 마지막 원고 제목은 <참말로 다시 일어나고 싶다>였다. 눈물이 어른거린다. 아~ 최인호여. 이 글에서 인호 형은, 소설가 김유정이 이승을 마감하기 10일 전에 얽은 편지,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펑펑울었다.’고 썼다. ‘갈 수만 있다면, 가난이 릴케의 시처럼 위대한 장미꽃이 되는, 불쌍한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막다른 골목으로 돌아가서, 김유정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고 싶다’고했다. 최인호의 소설을 모티브로 환생시킨 드라마와 영화는 바보들의 행진·상도·해신·별들의 고향·지구인 등이다.

<고래사냥> 원곡 가수 송창식은 1947년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6.25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3년 뒤에는 어머니와도 헤어져야 했다. 그는 부모 없이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노래를 좋아했고, 잘 불렀다. 6학년 때 인천여상 강당에서 오케스트라를 보고 나서 가수의 꿈을 가졌단다. 그 꿈 덕분에 인천중학교 대표로 음악콩쿠르에 참가하여 1등도 하였다. 그는 서울예고에 지휘자 금난새(1947~)와 동기동창으로 성악과에 입학하였으나, 중간에 학교를 그만둔다.

그가 세시봉 무대에 서게 된 것은 운명이었을까 숙명이었을까. 그는 친구가 다니던 홍익대에서 노래하다가 우연히 동갑내기 이상벽(1947~. 황해 옹진 출생)의 눈에 들어 세시봉에서 윤형주를 만난다. 쎄시봉(C'est Si Bon)은 1947년 앙드레 오르네즈가 작사하고 앙리 베티가 작곡한 프랑스의 샹송인데, 1950년에 제리 시렌이 영어가사를 써서 <It's So Good> 타이틀의 노래가 되었다. 이를 본딴 서울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은 1953년 무교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이다. 이후 1963년에 서린동으로 옮겼다가 1969년 문을 닫은 것이 원조이며,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부지기수로 늘어난 음악감상실이 이를 본딴 것이다. 이곳에서는 커피 한잔값으로 하루종일 앉아서 팝송·샹송·칸초네를 즐길 수 있었다. 여기서 만난 동료 윤형주와 1967년에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70년에 솔로로 데뷔면서 청년 감성을 관통하는 <고래사냥>을 포효했고, <피리 부는 사나이>와 <왜불러>처럼 1970년대 중반을 상징하는 애창곡들을 불렀다. 그의 노래는 가사도 시대 이념을 혼융하고 있지만, 절규하듯 내어 지르는 목소리의 울림은 듣는 이들의 막막한 가슴을 훌훌 털어내 준다. 윤형주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이다.

송창식하면 특이한 개량한복(改良韓服)이 떠오른다. 부인 한성숙이 한복 연구가라는 말까지 덧붙는다. 부인이 한복 전문가는 아니다. 그는 1984년경부터 개량한복을 입는데, 그 동기는 1976년 홍콩 아마추어 가요제 참석 때 입은 한복 덕분이다. 그때 송창식 스스로의 눈에 비친 첫날의 양복은 후줄근하고, 둘째 날 입은 한복은 최고로 멋져 보였단다. 이후 스스로 복제 공부를 하고, 1977년 결혼 후 부인에게 연구를 맡겼다. 이후 부인이 송창식의 옷본을 만들었는데, 그 옷본을 이태원 한복 프로들에게 가져갔다가 퇴짜를 맞는다. 그렇게는 만들 수 없다는 말을 들은 후, 김도향(1945~)이 소개한 보광동 세탁소 아주머니에게 맡겨서 만들기 시작한 한복이 100벌이 넘는단다. 도처상수(到處上手), 전문 프로 위에 실용 프로가 있음이다. 이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 전통도 귀하지만, 실용은 더욱 편리하다.

1975년은 우리나라 청년문화의 극점이었다.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은 캠퍼스를 뛰쳐나와 문화적 헤게모니(주도권)를 장악한다. 통기타 뮤지션들의 노래는 산업화의 그늘과 억압으로부터 탈출구를 찾으며 부글거리는 욕망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하지만 강력한 파급력을 지녔던 노래는 불행하게도 급작스럽게 파국을 맞아야 했다. 1975년 정부는 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내세워 대중가요 재심 원칙과 방향이라는 가요규제를 선포했다. 이를 통해 무려 4백여 곡에 대해 음반발매와 방송을 금지하는 탄압의 칼을 빼 들었었다.

이 칼이 겨냥한 주 표적이 통기타와 로큰롤 가수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25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던 하길종 감독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음악은 통기타군단 선두주자 송창식이 맡았었다. 그는 이 영화 속에 <왜불러>·<고래사냥>을 흐르게 했다. 그중 <고래사냥>은 당시 대학가 청년 지식인들이 안고 있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은유하고 있음을 이유로, 금지곡의 표적이 된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청년들 내면 풍속도이고 이를 겉으로 형상화한 시대의 절규였다.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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