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한국대중가요 100년 세월에는 역사 속 인물들을 환생시킨 노래가 많다. <장녹수>·<충무공>·<논개>·<계월향>·<테스 형>(소크라테스) 등이 이런 노래다. 고사곡(古史曲)이라고도 한다. 이에 더한 곡조가 2007년 박상철이 불러낸 <황진이>다. 노래 속 화자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의 기생이다. 그녀는 박연폭포·서경덕(화담)과 같이 송도3절(松都三絶)의 한 사람이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빼어난 세 사람. 그녀는 어디를 가던 선비들과 문필답(文筆答)으로 어깨를 겨룰 수 있었고, 시·예·가·악(詩·畵·藝·歌·樂)을 논할 수 있는 묘수선녀(妙手仙女), ‘천인 신분 양반들 머리’였다. 2007년 이러한 기생 황진이를 500여 년 만에 살려내어 노래 속의 화자로, 한솔이 노랫말을 엮고, <뿐이고>를 부른 박구윤의 아버지 박현진이 곡을 붙여서 38세 박상철이 불렀다. 노랫말은 1956년 조민우가 불렀던 <잘 있거라 황진이>를 모티브로 한 듯하다.

어얼씨구 저얼씨구 너를 안고/ 내가내가 돌아간다/ 황진이 황진이 황진이~/ 내일이면 간다 너를 두고 간다/ 황진이 너를 두고/ 이제 떠나면 언제 또 올까/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피고/ 뻐꾸기가 울 텐데/ 그리워서 어떻게 살까/ 능수버들 늘어지고 소나기가 내리면/ 보고파서 어떻게 살까/ 그래도 가야지/ 너를 두고 가야지 황진이 너를 위해/ 내가 사랑한 나의 황진이/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어얼씨구 저얼씨구/ 너를 안고 내가내가 돌아간다/ 황진이 황진이 황진이~/ 내일이면 간다 너를 두고 간다/ 황진이 너를 두고/ 이제 떠나면 언제 또 올까/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봄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가면/ 그리워서 어떻게 살까/ 하늘에서 꽃송이 하얗게 내리면/ 눈물 나서 어떻게 살까/ 그래도 가야지 너를 위해 가야지/ 황진이 너를 위해/ 내가 사랑한 나의 황진이/ 사랑아 사랑아 내 사랑아/ 어얼씨구 저얼씨구/ 너를 안고 내가내가 돌아간다/ 황진이 황진이 황진이.(가사 전문)

황진이는 개성(송악)에서 출생한 여인으로 이름이 진, 또는 진랑이고 기생이름은 명월이다. 이 여인의 기생 이름을 따서 1909년 서울 광화문 거리(동아일보 사옥 자리)에 오픈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 명월관이다. 이 명월관의 분점이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인사동 태화관이다. 황진이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1567년으로 추정한다. 역사 속 인물 가운데 소설이나 영화로 가장 많이 엮인 주인공이 황진이다. 그녀는 황진사의 첩실 서녀였으며, 어머니는 진현금이라는 맹인 기생이었단다. 그녀는 15세에 기생이 되는데, 이는 이웃집 총각이 황진이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이에 기녀의 길로 들어섰단다.

황진이는 서경덕(1489~1546)을 사모하여 그를 찾아갔다가 그의 높은 식견과 인품에 감탄하여 제자가 되었으며, 벽계수(1508~? 세종 임금의 서자 영해군 손자, 이종숙)를 후리기 위하여 시조를 지어 읊조렸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할제 쉬어간들 어떠리.’말을 타고 지나가던 벽계수는 이 시조에 귀를 기울이며 뒤를 돌아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이때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 이구먼’ 이라고 하며 획 돌아 가버린다. 벽계수는 중종 3년 1508년에 태어나 35세에 관찰사를 지냈다. 또한 당시 생불(生佛)이라고 불리던 지족선사(개성 천마산 지족암 승려)의 면벽 수도를 파계하게 하였단다. 소세양(1486~1562)이라는 사람이 황진이와 30일간의 사랑을 청하여 이를 수락하고 30일 후 헤어질 때, 황진이는 그에게 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을 지어주었다.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 밝은 밤이면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시나요.’이 시는 이선희가 부른 <알고싶어요> 노래의 모티브다.

당시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을 합하여 6년을 살다가 헤어진다. 황진이가 이사종에게 반한 것은 27세의 이사종이 중국으로 가면서 송도 냇가에 누워서 읊은 시 한 편 때문이었단다. 그녀의 최후는 분명치 않으나, 스스로 ‘자기 때문에 천하의 남정네들이 자정하지 못하였으니, 자기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개성 동문 밖 개울가에 시체를 두어 여인들의 경계를 삼도록 하라’고 유언을 하였단다.

한평생 이 황진이를 흠모하다가 그녀 사후에 무덤을 찾아간 호걸이 바로 임제, 임백호이다. 그는 조선 명종 4년부터 선조 20년까지(1549~1587) 38세의 짧은 생을 살다가 간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황진이를 사모하며 평양감사·서도병마사가 되기 위하여 노력한다. 마침내 그는 서도병마사 임명을 받고 황진이가 있는 개성으로 향하지만 이미 그녀가 죽었음을 전해 듣는다. 이에 부임 길을 돌려 황진이 무덤이 있는 송악산 기슭으로 가서 ‘청초 우거진 골이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시조를 읊었다. 이 일로 임백호는 파직된다. 파직 후 평민 복을 입고 찾아간 기생이 평양의 한우(寒雨)다. 기생 한우는 평복을 한 임백호를 문전박대 했지만, 그의 시에 반하여 뜨끈한 이불 속으로 그를 불러들였었다. 그들이 주고 받은 시가 징표다. ‘북창이 맑다하여 우장없이 나섰더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비가 오네/ 오늘은 찬비(寒雨)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이에 한우가 답 시를 적어서 대문간에 기대선 임제에게 보낸다.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두고 얼어 자리/ 오늘도 찬비 맞았으니 녹아잘까 하노라.’이런 시조들은 어느 때쯤 오선지 위에 올라 탈 수 있을까.

박현진은 1950년 부산 출생, 가수 박구윤·작곡가 박정욱의 아버지다. 트로트 히트 메이커이, 아들의 히트곡 <뿐이고>·<나무꾼>·<두바퀴>가 그의 조탁 예술품이다. <봉선화 연정>·<신토불이>·<네 박자>·<야간열차>·<무조건>·<자옥아>·<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도>·<남남북녀>·<큰소리 뻥뻥>·<장모님>·<애인>·<인생은 생방송>·<와인글라스>·<연하의 남자>·<영수증을 써줄거야>와 임영웅의 미스터트롯 결승곡 <두 주먹> 등이 그의 멜로딩이다. 그는 KBS의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 딩동댕~ 아저씨다.

박상철은 1969년 삼척 근덕면 양리 출생, 삼척고를 졸업하고 미용사자격증을 취득하고 삼척 시장통에 박상철헤어아트를 운영하였다. 그는 미용사를 하면서 고객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어 그들로부터 ‘노래하는 미용사’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는 1993년 전국노래자랑 삼척시편에 출연하여 유열의 <화려한 날은 가고>를 불러 최우수상을 받고 가요계와 통로를 만들었고, 그로부터 7년 후인 2000년 작곡가 박현진을 만나 미용사를 그만두고 가수로 데뷔를 하였다. 그가 인기가수 반열에 오른 것은 2002년 <자옥아>다. 이후 2005년에 <무조건>, 2007년 <황진이>, 2010년 <빵빵>이 연이어 터지면서 ‘트로트계의 서태지’라는 별명을 얻는다.

KBS 전국노래자랑(1980.11.9.~) 국민 MC 송해는, 이 프로그램이 낳은 최고의 스타는 삼척시 편 최우수상 수상자인 당시 26세 박상철을 꼽는다. 다음 스타로 꼽히는 가수는 장윤정이며, 그녀는 평택편에 9세의 어린 나이로 출연한 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56년 조민우가 부른 <잘 있거라 황진이> 노랫말을 보자. ‘나는 간다 나는 간다 황진이 너를 두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머나먼 황천길에/ 서화담 그리운 님 저승 간들 있을 소냐/ 섬섬옥수 고운 손아/ 묵화치고 글을 짓던 황진이 내 사랑아.’이 노래는 서화담(경덕)이 이승을 등질 때 황진에게 남긴 유언을 모티브로 했던 곡이다.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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