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어디에서인가 들려오는데, 보이질 않는다. 바람의 노래이고 울음이다. 은근하게 불 때는 노래로 들리지만, 광풍·열풍·폭풍·태풍으로 불면 이미 노래가 아니다. 나의 사랑이 은은한 노래를 하는 저 바람결과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발랄 상큼하면 더욱 좋으련만, 그런 사랑이 어디 쉬운가. 1993년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 앉은 작사가 김지평이 어디서인가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예술가는 눈으로도 보지만 영혼으로도 볼 수가 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귀로 듣고 영혼으로도 듣는다. 우리는 저마다 자연인으로서 통속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가 있다. 포롱거리는 벌과 나비들의 나래짓 같은 사랑 바람에 얽히면 포근한 가슴팍의 예술가가 되지만, 그런 사랑이 떠나가면 눈물 그렁거리는 멍든 영혼이 된다. 사랑의 노래인가, 이별의 울음인가. 보이질 않는 바람, 그대는 어디에서 저 바람 소리 듣고 계시는가. 숨어서 울고 있을 사랑하던 그대여~.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 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으면/ 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 우는 바람 소리// 둘이서 걷던 갈대 밭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 잊는다 하고 무슨 이유로/ 눈물이 날까요/ 아~ 길 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 쓸쓸한 갈대숲에/ 숨어 우는 바람 소리.(가사 전문)

사랑을 찾아 나선 소녀인가, 사랑을 잃어버린 중년인가, 황혼인가. 노래 속 주인공은 김이 모락거리는 찻잔을 마주하고, 외로운 바람 소리에 홀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나절에서 어두운 저녁을 지나 달도 기울었다. 잊자, 잊자, 잊어버리자 다짐을 하고도 눈물이 난다. 우리네 인생이다. 나는 길을 잃은 사슴인가. 꽃떨기 통째로 떨구어버린 동백나무인가. 마른 꽃떨기 아물고 놓지 못하는 들국화인가.

<숨어 우는 바람 소리>는 1993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24세이던 이정옥이 불러 대상을 받은 곡이다. 이후 김연숙·김욱·이창휘·들무새·손창수·유일청·김재성 등 가수들이 리메이크로 불렀으며, 607080세대 중년 아낙네들의 단골 애창곡 1위 언저리를 맴도는 노래다. 우리나라에 노래방이 본격적으로 쩌렁거린 시기는 1991년이다. 그러니 이 노래는 노래방 바람을 탄 인기곡으로도 시기가 적절했다. 스산한 바람 부는 저녁, 달빛을 타고 들려오는 갈대숲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사이로 보이는 통나무집 창가에 앉아서, 따스한 찻잔을 두 손으로 모아 감싸고 옛 추억에 젖어보시라.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는 어디에 계시는가. 너보다 더 너를 사랑했던 나는 여기 우두커니 앉아서 바람 소리에 울고 있는데...

이정옥은 1969년 구례에서 출생하여, 1991년 목포 난영가요제에서 <추억은 강물처럼>으로 대상을 받으며 데뷔하였다. <숨어 우는 바람 소리>는 가수 이름보다 노래 제목이 더 많이 알려진 곡이다. 가수 이정옥을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는 아낙네는 많지 않다. 그녀는 1980년대 서울로 와서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중 기회를 맞았었다. 김욱과 인연이었지만, 음반은 내지 못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녀는 1991년 난영가요제 출전해서 새 출발을 한다. 하지만 길은 험난했다. 그러던 중 1993년 MBC 신인가요제에 출전했었다.

이후 그녀는 매니저도 스폰서도 없이 의상·분장·섭외·홍보·방송 출연을 혼자서 감당하는 가수 독립군(獨立軍, 대중예술인들의 속칭)으로 활동하지만 여의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1995년 청주에서 ‘백승태와 이정옥’이라는 듀엣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가수를 접는다. 이처럼 가수는 무대에서 사라져도 노래는 대중으로부터 사라지지 않는다. 이 노래가 바로 그렇다. 이정옥이 자연인으로 돌아가 숨은 바람처럼 사는 동안 노래는 각종 노래 경연과 노래방 선율을 타고 전국으로 울려 퍼진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이정옥은 다시 가수로서 고개를 든다. 2004년 그녀는 청주에 미사리스카이라운지를 오픈하고 노래를 재개하였다. 그리고 <킹왕짱>·<그대 앞에 서면>·<사랑이 남아서>를 발표하며 활동했다.

<숨어 우는 바람 소리>는 제목부터 서정적이다. 바람은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라, 허공중을 날아다니면서 대놓고 윙윙윙~ 우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 노래를 들으면 어딘가 바람 소리가 보이는 듯하다. 저만치 갈대숲 어디엔가 부스럭거리며 날아오르는 바람결이 보이는 듯하다. 그렇다. 이 노래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은근하고 짠한 맛이 녹아있다. 깊은 감수성을 가두어 억누르는데,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맛. 나긋나긋해 보이지만 은근한 불길로 한 삼십 년 달인 따끈따끈한 마음, 시간의 불가마 속에 다려 낸 맛이 들어있다.

이 노래 작사가 김지평은 서울구치소 교도관이었다. 그는 1972년 방주연의 히트곡 <당신의 마음>을 쓰면서 작사가로 데뷔했고, 1973년 한국가요대상에서 작사상을 받은 후 공무원을 퇴직했다. 교도관 시절 사형수들과 나누었던 교감이 그의 작품에 배어있는데, <당신의 마음>도 사형수들의 ‘알 수 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가사라고 한다. 패티김의 <인생은 작은 배>(구름은 사랑 없이 못가네/ 천년을 산다하여도/ 인생은 사랑 없이 못가네),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도 그의 손끝에 매달린 걸작이다.

<숨어 우는 바람 소리>의 주인공 갈대는 벼과(禾科)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인데, 마디로 자라는 대나무와 유사하여 이름 붙여졌다. 땅속으로 뻗는 마디 뿌리로 번식하는데, 꽃잎이 없는 풍매화(風媒花)로 8~9월에 핀다. 흔한 말로 길을 나서서 갈 때 바라보면 ‘갈대’, 올 때 바라보면 ‘올대’로 보인단다. 고구려 14대 봉상왕(재위, 292~300)을 폐위시키고, 15대 미천왕(을불, 재위 300~331)을 옹립할 때, 국상(국무총리) 창조리(倉租利)가 후산 북쪽 사냥터에서 갈대 잎을 모자에 꽂으니 모두 따랐으므로, 마침내 왕을 폐하고 미천왕을 옹립하였다. 이때 갈잎은 쿠데타에 동참하는 표식이었다.

2019년 KBS 아침마당, 도전 꿈의 무대에 비구니승 도연 스님이 출전하여 <숨어 우는 바람 소리>를 열창했었다. 스님은‘어릴 적 출가를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풀 수 없는 질문 때문에 결국 출가하게 됐다.’고 비구니가 된 이유를 설명했다. 도연 스님은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단다. 산사와 세속을 오가는 스님들은 바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 소리는 누구나가 들을 수 있지만, 바라볼 수는 없음이여. 바람 같은 그대, 어디에 계시는가. 바람의 노래 들리는가. 울음소리 듣고 계시는가. 오늘 밤 그대 작은 방, 달빛 창문을 바람이 두드리면 나인 듯 맞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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