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겨울이 깊어간다. 대중들의 옷은 두터워 지고 마음은 따스해진다. 차가운 바람의 한 가운데, 남녘 산 너머에서 아랑거리는 새 기운을 기다리는 마음이 사랑을 갈망하는 아낙네의 마음 화로와 같다. 긴 세월 어둡던 보건 의료환경을 견디어 이겨낸 터널의 끝이 다가오기도 한다. 1985년 어느 겨울날 창밖 텅 빈 마당에 마른 잎이 나뒹굴고, 먼 산과 들에는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투명한 유리 벽 밖에는 차가운 마른 바람이 쏴아~ 불고, 조용필은 해맑은 증기가 피어오르는 찻잔을 마주하고 <그 겨울의 찻집>을 노래했었다. 드라마 <사랑의 계절> 주제곡이었다. 이 노랫말은 작사가 양인자가 경복궁 근처 다원(茶院)에서 차를 마시며 30여 분 만에 지은 노래다. 그녀가 바라본 산은 인왕산과 북악산 자락이었을 터이다. 양 여사는 바람 속을 마음의 발걸음으로 바라보면서 가사를 썼단다. 마른 꽃다발 걸려 있는 창가에 앉아서, 아름다운 사랑의 죄를 뉘우치는 노래 속의 화자를 불러낸 것이다.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새운 날들을 노랫말에 걸쳤다. 날씨는 스산하고 차가운데, 사랑하던 님의 이름은 따끈따끈하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센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센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가사 전문)

그대, 가슴속에서 식지 않는 뜨거운 이름이 있는가. 그 이름을 안고 홀로 지세운 외로운 밤이 있는가. 사랑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멀어져 간 사랑도, 가슴속에 품고 사는 사랑도 한 떨기 꽃이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사랑이여. <그 겨울의 찻집> 노래와 어울리는 시가 있다. ‘허무의 멍울 앞에/ 눈물 마르도록 사랑하고/ 채우려 채우려 애를 써 봐도/ 하늘에 떠도는 한 점 구름처럼/ 강가에 떠도는 한 잎 나뭇잎처럼/ 더 큰 그리움이/ 슬픔 뒤에 가려진 그림자 되어/ 내 마음을 채근하는 아쉬움 속에/ 말없이 이정표 없는 길을 떠난다.’ 류교열의 <허무 속의 그리움>이라는 시다. 사랑은 서로가 원한다고 오래오래 머물지 않는다. 서로의 원함이 마주하여 맞닿지 않으면 손을 놓아버린다. 깊은 겨울 속에 마른 잎을 다 놓아버린 나목(裸木)의 간들거리는 가지처럼.

조용필은 <그 겨울의 찻집>을 부를 당시 35세였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 음반발매)로 큰 인기를 얻어 스타 덤에 올랐으나, 대마초 사건으로 방송출연금지를 당했다가 1979년 스물아홉 살에 <창밖의 여자>로 복귀한다. 이 음반은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에 이은 1백만 장 판매기록을 세웠다. 또한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창밖의 여자>가 금상을, <한 오백년>이 열창 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조용필은 <촛불>·<미워 미워 미워>·<고추잠자리>·<못 찾겠다 꾀꼬리>·<친구여>·<여행을 떠나요>·<허공>·<킬리만자로의 표범> 등을 연이어 히트시킨다. 그러나 조용필은 1986년 <허공>으로 SBS 제1회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시상식에 나가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민가수 시대의 마감이었다. 그 이후에는 국민가수가 너무 많았다. 2021년 내일은 국민가수 경연 프로그램도 나왔다. 시청률과 대중들의 박수 소리에 취해 너무 가벼이 말하지 말라, 국민가수라는 이름을. 이난영·황금심·백설희·남인수·현인·이미자·패티김·배호·나훈아·남진·조용필이 저만치에서 눈망울을 크게 뜨고 관망하고 있다. 1980년 조용필은 미국 카네기홀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미국과 일본 등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1988년에는 일본 포리스타에서 <추억 속의 미아>(사랑에 빠져 당신에게 지쳐서/ 사는 것에도 한숨이 나와요~)로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였다. 1994년에는 사상 최초로 총 음반 판매량 1천만 장 돌파라는 기록을 세우며 국민가왕(國民歌王)이 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이후 국창가수(國唱歌手)라는 말이 있었다. 나라의 명창이란 의미, 빼어난 기량을 지닌 전통가요 광대를 의미한다. 관례적으로 이 국창이란 말은 판소리계에서만 쓰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어전광대(御殿廣大)란 말로 쓰였단다. 조용필은 이후 10여 년간 소강기를 지내다가 2013년 19집 앨범 <헬로>·<바운스>로 신 장년의 반란을 일으키며 다시 세상과 소통한다.

그는 1950년 화성시 송산면 바닷가에서 소금밭(염전, 鹽田) 일곱째로 태어났다. 서울로 유학을 온 그는 경동중학교를 국민배우 안성기와 동창으로 졸업하였으며, 1968년 경동고를 졸업하고 컨트리 웨스턴그룹 애트킨즈를 결성하여 미8군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하지만 무명의 세월이 길었다. 안성기는 동성고로 진학하여 배우의 길로 들어서 오늘날 국민배우가 되었다. 이후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음반 제작보다 노래로 먼저 발표하였고, 그해 9월 재일교포 조총련계 추석성묘단 모국방문을 터닝포인트로 인기 상승의 날개를 단다. 그 시기 대마초 파동(1975.12.3.)으로 텅 빈 대중가요계 마당을 꽉 메워버렸다. 하지만 자신도 1977년에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1979년까지 방송 출연 금지를 당했다가 해금되면서 화려한 조용필 시대를 다시 연다. 가왕(歌王) 조용필, 1980년대 대중가요를 말하면서 누가 조용필을 비켜 갈 것인가. 조용필은 1984년 남양주 광릉 수목원 근처 봉선사에서 ‘일요일 사찰 007백년가약’을 맺었었다. 이 시기는 <일편단심 민들레>를 부른 1981년과 궤를 같이하며, 첫 부인 박지숙과 열애의 결실이었다. 박지숙은 조용필보다 6세 아래, 동덕여고와 한양대를 졸업하였고, 아버지(국회의원 박찬)가 이사장이던 공주 신풍중고등학교 체육선생을 하고 있을 때다. 하지만 이들은 7년 뒤 결별한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재미(在美) 사업가 안진현. 그녀는 1994년 63빌딩 그랜드 볼 룸에서 결혼하지만 10년 만에 사별(급성심근경색)하여, 화성시 송산면 선산에 안장됐고, 이후 조용필이 한 달에 한 번꼴로 꽃다발을 들고 묘소를 찾는단다.

작곡가 김희갑은 1936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1951년 6.25 전쟁 중에 월남하여 대구에서 살았으며 대성고를 졸업했다. 그는 1961년부터 재즈기타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1964년부터 록밴드 키보이스의 음반 프로듀서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작곡가로 활동을 한다. 그는 소설가이자 드라마 작가인 부인 양인자와 콤비로 창작을 하지만, 김중순·지명길·박건호 등과도 다수 작품을 제작한 대중가요 히트 제조기다. 1951년 아버지 손을 잡고 남으로 온 그는 펜 대신 기타를 잡았고, 결국 한국의 세고비아로 불리며 박시춘·박춘석과 함께 한국 3대 작곡가로 불린다. 그는 아침마다 로맨틱한 기타 선율로 부인을 깨운단다. 그의 부인 양인자는 1945년 함경북도 나진에서 선박 정비를 하던 아버지의 유복녀(遺腹女)로 태어나 부산으로 온다. 그녀는 부산여중 3학년 때 숙제로 쓴 소설 《돌아온 미소》로 언론이 대서특필한 문학적 천재다. 창밖에 가느다란 눈발이 간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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