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송해 1927> 영화가 세상을 향하여 희망과 인생 반추의 빛을 서서히 비추고 있다. 본명 송복희는 최고령 현역 연예인·전국노래자랑 최장수 MC·가수·희극인·DJ·국민할배·국민형아~ 등등의 별칭을 달고 다니는 만능 엔터테이너, 종합예술극장이다. 평생을 우리 국민 희로애락과 함께해 온 송해!, 무대 위와 무대 뒤에 얽힌 그 형님 인생의 빛과 그림자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와 맞물린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우리나라 근대사의 분기령(分期嶺)으로 치고, 해방광복(1945.8.15.) 이후를 현대사의 출발점으로 치면, 95세 송해의 인생은 근대와 현대의 역사 줄기에 매달린 이슬과 서리를 동시에 머금은 꽃떨기이고 튼실한 씨앗이 될 열매이다. 2021년 11월 9일, 아침마당에 1927년생 송해와 2011년생 홍잠언(평창 출생)이 손을 마주 잡고, 1941년 이 세상에 나온 노래 <아주까리 등불>을 열창했다. 흘러온 유행가가 84년의 연세 차이를 이어 준 것이다. 대중가요 유행가는 역사의 강에 띄워진 돛단배, 보물이고 징검다리이고 오솔길이다.

피리를 불어 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산 너머 아주까리 등불을 따라/ 저 멀리 떠나가신 어머님이 그리워/ 너 울면 저녁별이 숨어버린다/ 자장가 불러 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울다가 잠이 들면 엄마를 본다/ 물방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석양(고향)길/ 날리는 갈대꽃이 너를 찾는다// 피리를 불어 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산 너머 아주까리 등불을 따라/ 저 멀리 떠나가신 어머님이 그리워/ 너 울면 저녁별이 숨어버린다/ 자장가 불러 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울다가 잠이 들면 엄마를 본다/ 물방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석양(고향)길/ 날리는 갈대꽃이 너를 찾는다.(가사 전문)

<아주까리 등불>은 엄마를 찾는 아가를 등에 업고, 그 아가를 달래주는 슬픈 자장가이다. 아가의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눈물이 난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31년 차, 서글픈 환희의 빛을 절규하던 해방광복 4년 전이던 대한제국 34년 차의 우리나라 서정과 서사이다. 엄마는 젖을 찾는 아가를 두고 왜, 야심한 밤에 등불을 따라 재를 넘어갔을까. 그 시절 왜놈들이 압송하듯 끌고 간 우리의 누이들 조선여자근로정신대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는 정신대의 고용조건·동원권자·의무규정 등을 명시한 일본 왕 칙령 제519호 <여자정신근로령>(1944년 8월 22일 공포)이 근거이며, 이에 따라 왜국으로 끌려간 우리들의 누이들은 7만여 명이었단다.

이 노래는 1941년 오케레코드사 음반 K5034에 박향림이 부른 <해 점은 황포강>(해 저문 황포강)과 같이 실린 곡조다. 두 곡 모두 노랫말은 조명암이 지었고, 가락은 이봉룡·김해송이 공동으로 얽었는데, 두 사람은 처남 매부지간이다. 이복룡은 이난영의 친오빠다. 이 노래 속의 화자는 엄마와 헤어진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자장가를 부르듯이 읊조린다. 슬프고 애잔하다. 등에 업힌 아가는 엄마와 사별하였을까 생이별하였을까. 다시 만났을까. 이 대목에서 <보릿고개>를 열창하는 유랑극단 출신 진성(1960년 부안 출생)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린다. 진성은 아직도 어린 시절 헤어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를 만나지 못했단다. 노래 속의 주인공 아가와 21세기 국민 가객 진성의 유아기가 비슷한 사연으로 맞물리는 까닭이다. 1941년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중일전쟁(1937~1945. 일본패망)을 치르면서, 미국 태평양사령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해, 우리나라는 식민지 31년째였다.

아주까리 등불은 아주까리 열매로 짠 기름에 심지를 달아 불을 붙인 등불이다. 불꽃 바람막이는 문종이(창호지)를 4각으로 붙인 것과 유리를 4면으로 벽처럼 가공한 것도 있었다. 이 등불을 들고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어둠을 가누면서 고갯길을 넘어가고 넘어왔다. <아주까리 등불> 속 아가의 엄마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아주까리는 동아프리카·인도가 원산지인데, 피마자(蓖麻子)·피마주라고도 부르며, 우리나라에서는 일년생이고, 열대지방에서는 다년생 초본식물이다. 보통 2~3미터로 자라고 줄기에는 20개 내외의 마디가 있고, 잎은 7∼11조각으로 갈라진 장상엽(掌狀葉)이다. 열매는 42∼56%의 유분(油分)을 포함하고 있어서 기름을 짜서, 식용·머릿기름용·등잔불용으로 사용했다.

아주까리의 우리나라 기록은 1433년(세종 15)에 간행(유효통·노중례·박윤덕)된 의약서, 《향약집성방》에 약용 용도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5세기 이전에 들어 온 것으로 본다. 아메리카 선교사에 의하여 도입되었다고도 보는 설도 있다. 종자는 설사·소종·발독의 효능이 있고, 기름은 등불용·비누 재료·화장품 원료·인주용(붉은 도장밥) 등으로 사용된다. 아주까리 잎은 나물로도 먹고, 살짝 데쳐서 쌈으로도 먹는다.

<아주까리 등불> 원곡 가수 최병호는 1916년 전남 무안 출생, 그는 목포 양동이 고향인 이난영과 동갑내기다. 본명은 최재련(崔載連), 처음 데뷔했을 때부터 예명을 최병호라고 썼단다. 가수 데뷔 이전 이력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 목포 출신 작곡가 이봉룡의 권유로 가수가 되었다. 1940년 5월 제1회 오케(Okeh)레코드사 콩쿠르에 참가하여 전남지역 예선을 거쳐 서울 본선에서 입선했단다. 당시 함께 선발된 신인가수는 권명성·박달자·김선영·손석봉·성일·심원·봉일 등이며, 이들의 데뷔 음반은 1940년 8월에 발매되었다. 최병호의 데뷔곡은 <십 년이 하룻밤>이며, <아주까리 등불>·<사면초가>·<황포돛대> 등을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했다.

이 시기 조선악극단에서도 활동했으며, 그는 눈도 깜빡거리지 않을 만큼 거의 움직이지 않고 부동자세로 노래를 불렀단다. 1943년 말에는 김해송과 함께 약초(若草, 만약에 풀이라면)가극단에서 활동했다. 그는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기예증(技藝證, 연예인 자격증)이 있었는데도 강제 징용되었었는데, 일부러 미친(미치광이) 척을 해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고, 오케레코드 선배 가수 송달협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1945년 광복 이후 1949년까지 김해송의 KPK악단(악단장 김해송(K)·연출가 백은선(P)·무대연출 김정환(K)의 성 이니셜)에서 활동했고, 국도악극단·박시춘악단·무궁화악극단 무대에도 섰다. 1994년 2월 21일에 타계했다. 78세였다.

<아주까리 등불> 노래는 가사를 일부 고친 곡조도 있다. ‘피리를 불러 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산 너머 고개 넘어 까치가 운다/ 고장길 구십리에 어머님을 잃고서/ 네 울면 저녁별이 숨어버린다// 노래를 불러 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울다가 잠이 들면 엄마를 본다/ 물방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고향길/ 날리는 갈대꽃이 너를 부른다// 방울을 울려 주마 울지마라 아가야/ 엄마는 돈을 벌러 서울로 갔다/ 바람에 깜빡이는 아주까리 등잔불/ 어머니 개울 건너 마실을 간다.’ 이 가사를 보면, 아가는 엄마와 사별한 것은 아닌 듯하고, 그 시절 세월 풍파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간 듯하다. 노래 속의 아가는 훗날 엄마의 품에 안기었을까.

송해는 1988년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은 이후 지구 10바퀴가 넘는 거리를 누비며 국민 MC로서 대한민국 감흥 배의 돛대와 삿대를 저었다. 그는 손글씨로 스스로 대본을 작성해서, 여러 번 반복 숙지하며, 정성을 다하는 아이콘으로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프로 중의 프로, 왕중왕 딴따라다. 최초로 임명된 KBS 명예사원이기도 하다. 2016년에 서울시 종로구에 송해의 이름을 붙인 거리, 송해길이 조성되었다. 송해 형님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도 많다. 그 남자의 슬픈 현실은 우리 아버지들의 현재진행형 삶의 이야기다. 국왕도 대통령도 인기 연예인도 집 안에 들어서면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아버지일 뿐이다. 피리를 불어 주마 울지마라 아가야~를 열창하던 그 아버지는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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