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하얀 소의 해, 신축년(辛丑年)이 저물어 간다. 뒤돌아보면 아늑한 나날이었다. 보건의료 환경도 실물경제 상황도 여의치 못했다. 각양각색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우민우권(愚民愚權), 정치꾼들의 뒷모습도 눅눅하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마음을 가지런하게 가져야 한다. 이런 시절에 부를 노래가 윤복희가 열창한 <왜 돌아보오>이다. 뒤돌아보되 머뭇거리지 말고 앞을 지향해야 한다. 떠나가는 당신을, 떠나가는 세월을, 떠나가는 바람을 부여잡아 무엇하리. 이 노래는 1979년 윤복희가 두 번째 남편 남진(1946~. 목포 출생, 본명 김남진)과 헤어진 후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오빠 윤항기가 여동생을 위로하기 위하여 만들어준 곡이다. 한 가수의 인생 위로 곡인 동시에 대한민국 대중들의 감성을 위무한 곡조다. 사랑한다 말을 마오, 유행가 가사인 줄 아오. 갈래면 가지 왜 돌아봅니까.

갈래면 가지 왜돌아보오/ 갈래면 가지 왜돌아보오/ 떠나가는 당신을 붙잡을 줄 알고/ 갈래면 가지 왜돌아보오/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하나요/ 마음속에 눈물을 보아야 하나요/ 사랑한다 말을 마오/ 유행가 가사인 줄 아오/ 갈래면 가지 왜 돌아봅니까// 지나간 일들을 잊으라니요/ 지나간 일들을 잊으라니요/ 사랑이 무슨 장난인가요/ 갈래면 가지 왜돌아보오/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하나요/ 마음속에 눈물을 보아야 하나요/ 사랑한다 말을 마오/ 유행가 가산줄 아오/ 갈래면 가지 왜 돌아봅니까.(가사 전문)

노랫말이 절절하다. 축축하다. 묵직하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여인의 애간장을 끊는 듯한 애절곡(哀絶曲)이다. 사랑이 무슨 유행가 가사인가. 윤항기의 변이다. 그러면 아닌가. 사랑이 유행가 노랫말과 다르다는 증표는 어디에 있는가. 인생도 사랑도 권세도 계절도 모두 다 유행가 노랫말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노래 속의 떠나간 당신은 윤복희의 첫 남편은 독일계 혼혈아 유주용이라고 보면 되리라. 서울대를 나오고 <부모> 노래를 부른 엘리트 가수, 이들은 1968년 결혼 후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유주용은 가수를 접고 윤복희의 매니저로 활동하였는데, 4~5년 뒤 어느 언론 매체에 난, ‘가수 남진이 윤복희를 사랑한다’는 기사를 보고 유주용이 아내에 대하여 예민해지고 믿음 관계가 깨져 결별한다. 뒤이어서 1975년 윤복희는 두 번째 남편 남진과 약혼발표와 동시 동거를 시작하여 1977년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6개월여 만에 별거하고, 이후 1980년 결별했다. 당시 남진과 윤복희의 뉴스가 세간을 들썩거렸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윤복희가 전했다. 이 결혼에 대하여 훗날, 윤복희는 첫 남편 유주용에 대한 반발심에 의한 결혼이었다고 회고했다. 남진과 이혼 후 유주용은 재결합을 제의하였으나, 윤복희는 이후 돌싱(돌아온 싱글)으로 산다.

윤복희는 1946년 종로 인사동에서 코미디언 윤부길과 무용가 성경자(예명, 고향선) 사이에 태어났다.(본적 당진, 보령 출생설도 있음) 가수·목회자 윤항기와 친남매다. 그녀의 아버지는 해방 전후 동경대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부길부길 쇼단을 이끌며 큰 인기를 누렸으며, 어머니는 전설적인 춤꾼, 일본 유학을 다녀온 고전 무용가였다. 이 두 예술인 사이에서 태어난 윤복희·윤항기 남매. 윤복희가 처음으로 무대에 선 것은 다섯 살 때, 아버지 부길부길 쇼를 통해서다. 윤복희가 첫 무대에서 떨지 않고, 노래와 창·안무·연기까지 완전히 소화해내자 사람들은, 천재 소녀가 나타났다며 그의 재공연을 청했었단다. 윤복희가 6살 때 아버지는 요양소에 가고, 7살 되던 어느 여름날 어머니의 비보(悲報)를 받았다. 묵호의 한 공연장에서, 3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심장마비였다. 이후 10살 때 아버지마저 작고한다. 남매의 인생을 그때부터 나락(奈落)에 빠졌다. 그렇게 어렵게 무대 인생을 이어간 윤복희의 인생이 역전으로 뒤바뀐다.

1963년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1901~1971. Louis Daniel Armstrong)을 만나면서부터다. 윤복희는 우리나라에 온 암스트롱 앞에서 그의 노래를 흉내 냈고, 이를 계기로 워커힐호텔 극장 개관공연(1963.4.8. 창립)에서 그와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또한 이어진 필리핀 마닐라 공연은 또 한 번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서울 출국을 하루 앞두고 클럽에서 윤복희의 노래를 들은 영국인 매니저가 영국 활동을 제안했던 것. 이에 1963년 해외 공연을 떠난 미8군 에이원쇼 단원 11명 중, 윤복희와 무용수 서미선·김미자·이정자가 주축이 되어 1964년 10월 싱가포르에서 걸 그룹 코리아 키튼즈를 결성했다. 이 코리아키튼즈는 영국 BBC 투나잇쇼에 출연, 아리랑과 갓 데뷔한 비틀스의 노래들을 불러 좌중의 갈채를 받았다. 이듬해엔 미국 라스베이거스 공연을 하고, 1966년에는 베트남전 위문공연도 했다. 이 당시는 윤복희·서미자·김미자 등 3명이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정부에서 종군연예인단(단장 박시춘)을 편성 위문공연을 하였으며, 위문공연은 1965년 6월부터 1971년까지 83차례에 걸쳐 1,160명이 파월되었고, 2,922회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윤항기·윤복희의 아버지 윤부길은 경성음악전문학교(서울대 음대) 1회 졸업생, 성악과 작곡을 전공한 일본 유학파다. 우리나라 최초로 인형을 이용한 복화술(複話術, ventriloquism, 입을 움직이지 않고 이야기하는 화술)을 한 코미디언, 황정자의 <처녀 뱃사공>(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작사가이기도 하다. 부인 성경자와는 일본 유학시절 라미라가극단에서 같이 활동했고, 윤항기·윤복희는 이런 예술가 부모의 DNA를 받고 태어났다. 윤복희는 자기 자신을 가수가 아닌 뮤지컬 배우라고 강조한다. 1977년 <빠담 빠담 빠담> 이후 80여 편의 뮤지컬에 출연했다. 윤복희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중들은 가장 먼저 미니스커트를 떠올린다. 그녀는 우리나라에 월남치마가 유행하던 1967년,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을 앨범 재킷으로 실었다. 그해 미니스커트 돌풍이 일어났다. 윤복희가 걸그룹 코리아키튼즈로 영국·미국 공연을 하고, 1월 6일 김포공항으로 귀국하였다. 이때 그녀가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고, 긴 바지에 부츠 신발을 신고 털코트를 입고 있었단다. 그 후 첫 독집 앨범을 내면서 앨범 재킷 표지에 붉은색 원피스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을 실었다. 그리고 신세계백화점 광고를 찍었다. 역시 붉은색 미니스커트를 입고서. 이때 카피는‘미쳤군, 미쳤어. 신세계가 온다.’였다. 이것이 그녀를 미니스커트의 여인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미니스커트는 파격과 여성 해방의 상징, 패션의 혁명이었다. 이후에 소문이 풍문이 되어 윤복희가 귀국할 때 미니스커트를 입고 왔다는 풍설(風說)이 나돌았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유행가는 유행을 낳는다.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검은 장갑>, <빨간 구두 아가씨> 등이 이런 노래들이다. 호랑이의 해 임인년(壬寅年)이 코앞에 다가왔다. 새해에는 유행을 낳는 유행가가 더 많이 탄생하길 고대한다. 2021년 아듀~, 코로나19여 안녕. 2022년 웰컴~. 새해는 발랄한 미니스커트처럼 상쾌한 햇살이 환하게 비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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