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새해가 밝았다. 임인년(壬寅年) 호랑이띠 해다. 새해에는 모든 것이 형통하기를 빈다. 우리나라가 더 환하게 진화했으면 좋겠다. 보건의료 환경도 쾌청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바람개비처럼 헛도는 듯한 빈 말총을 쏘아대는 정치꾼들도 뒷모습을 보이면서 어디론가 멀어져 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세상이 좀 더 평온해질 터이고, 화사해질 것만 같다. 그러면 검은 호랑이가 울창한 숲속에서 아침 햇살을 마주하며 어흥~거리듯이 온 나라가 더욱 활기를 되찾을 것이리라. 이런 마음에 떠오르는 노래가 송창식이 열창한 <해뜰날>이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을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을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날을 갈망하는 가수의 바램과 그 시절 대중들의 희망이 아우러져 이 곡은 큰 인기를 얻었었다. 힘겨운 우리네 인생에 구름은 늘 끼어 있다. 2022년 다가올 세월을 덮고 있는 잿빛구름도 녹록치않다. 그러니 <해뜰날> 같은 유행가가 더욱 절실한 것이다. 얼마 전 유행가 바람결에 풍구(風甌)질을 하는 사랑의 콜센타에 팬덤 가수의 스승이 등장했었다. ‘대구, 이건수. 저는 찬또베기의 선생입니다. 그에게 송대관의 <해뜰날>을 신청합니다.’ 전화 음성을 통하여 들려온 이 소리에 무대 위로 이찬원이 간들간들 등장했다. 진분홍 스크린에 별들이 반짝거렸다. 새해 아침에 쏟아지는 햇살 자락 같았다. 빙글빙글 샨데리아 불빛 아래 가수 모습이 오롯했다. ‘선생님을 위한 노래, 가즈아~’ 붐이 먼저 감흥의 시동을 걸었다. 전화기 저쪽에서 이건수 선생이 파이팅~ 추임새를 넣었다. 무대가 팡팡거렸다. TOP7이 저마다의 춤으로 흥을 더했다. 완전 대형 노래방이다. 대한민국 시청자들의 안방도 노래방이 되었다.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와~ 이선생의 탄성이 터졌다. 역시 내 제자~라는 감흥이 전송되는 듯했다. 붐은 뛰고, 희재는 돌리고, 동원이는 송대관의 개다리춤으로 걸렁거린다. 무대 스크린에 흰색 재킷에 붉은색 바지를 입은 송대관의 실루엣이 건들건들 사라진다. 2022년은 저마다의 꿈을 품고, 펼치고, 이루는 한 해가 되기를 앙망하는 마음을 이 노래에 싣는다.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해뜰날> 노랫말은 1975년 29세이던 송대관이 자신의 신세타령을 한 낙서다. 휘갈겨 적은 자탄(自嘆)이다. 데뷔 8년 차로서 이렇다 할 히트곡이 없던 무명 가객의 설움. 당시는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고, 대중문화예술계는 대마초 파동(해피스모그 사건. 1975.12.3.)으로 무주공산이 되었었다. 1973년부터 시작된 석유파동으로 서민들의 삶은 생활고와 정치권위의 억압이 중첩된 상태였다. 또한 청년들의 의식생태는 서구화 물이 들어서 자유분방을 표방하면서 청바지·통기타·생맥주·장발 문화가 만연하던 시기다. 이런 시대적 상황과 실패와 좌절의 몸부림 끝에서, 자신의 고달픈 애환을 유행가 가사 화(化)한 사연에 작곡가 신대성이 감성에 불을 댕기고, 휘발유를 뿌린 후 부채질을 하는 듯한 멜로디를 붙인다. 이때 코르스를 한 가수는 김연자(1959~. 광주광역시 출생)다. 오늘날 빛나는 <아모르파티>와 <블링블링>으로 무대 위를 휘 누비는 수피아여고 출신, 탑클래스 여가수 김연자를 연상해보시라.

송대관은 1946년 정읍에서 출생하여 전주 영생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친구 도움으로 자취생활을 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도움으로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하지만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후 1973년 <세월이 약이겠지요>와 1975년 이 노래 <해뜰날>로 인기를 얻어 여러 가수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해 대마초 파동에 휩싸여 미국으로 이민 가서 8년을 살다가 1988년 비슷한 사정으로 도미(渡美)했던 연예인(남진·태진아 등)들과 같이 귀국하여 <혼자랍니다>로 가요계에 복귀한다. 이어서 1989년 <정 때문에>가 히트를 하며 20만여 장이 팔린다. 이후 노태우(1932~2021. 경북 달성 출생) 정부의 전통가요 부활 정책 바람에 실린 유행가 열풍을 타고 태진아·설운도·현철 등과 함께 기성세대 트로트를 주도하였다.

<해뜰날> 노래는 창작 뒷얘기가 흥미롭다. ‘신 선생! 나도 한번 떠야것소. 밀어주셔잉!’송대관은 새벽 걸음으로 작곡가 신대성에게 달려갔다. 그의 손에는 누런 종이 위에는 휙휙 써 내린 가사 몇 줄이 적혀있었다. 당시 군 제대 후 종로 뒷골목 단칸방에 살고 있던 신대성은 그 종이 쪼가리를 받아들고는 머리에서 띵 하는 전율을 느꼈단다. 그리고 즉석에서 곡을 붙였다. ‘그래, 나도 좀 같이 살자.’<해뜰날>은 이처럼 송대관과 신대성의 의기투합 작품이다. 무명 가수이던 신인 김연자를 코러스로 세운 이유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허리띠를 조이며 궁핍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라는 가사를 따라 인기몰이 순풍에 돛을 달았다. 마침내 1976년 5월, 이 노래는 MBC 금주 인기가요 1위에 올랐다. 이 노래 원곡 가사는 ‘운명아 비켜라 내가 지나간다/ 떠도는 놈이라 괄시(恝視) 말아라/ 쨍하고 해 뜰 날 있을 거니까’였단다.

<해뜰날>이 발표될 당시 사회는 어수선했다. 정치적으로는 반공 캐치프레이즈가 펄럭거리던 시기였다. 신대성은 정보기관이 ‘해가 마치 김일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의심했었다’고 했었다. <해뜰날>은 이외에도 가사가 반항적이라는 이유로 공륜심의에서 두 차례나 퇴짜 맞았었다. 그러나 인기곡이 된 후에는 여당과 야당이 서로 행사곡으로 부르려고 경쟁을 벌이는 해프닝이 일기도 했었다. 일부에서는 송대관의 히트가 1976년까지 이어진 대마초 사건으로 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인기가수 대부분이 사건에 연루됐고 나머지는 장발·의상·제스처가 괴상한 퇴폐풍 가수로 분류돼 방송 출연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한국대중가요 무주공산기라고 한다. 윤수일·최헌·최병걸·조경수 등이 대중들의 인기를 얻던 시기와 맞물린다.

본명이 최시걸인 작곡가 신대성(1949~2010)은 술을 유난히 즐겨 했던 예술인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국민형님 송해의 <나팔꽃 인생>이다. 그는 늘 술상 앞에서 ‘보약 먹자’라고 하면서 첫 잔을 들었단다. 신대성과 동향 안동농림고(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김작사(김병걸에 대한 반야월 선생의 존대)의 회고에 의하면 신대성은 10대 후반부터 보드카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술만 보면 욕심을 냈단다. 가요계의 걸물 주당(酒黨)은 신대성·원희명·이호섭·장경수·김기표·박성훈·박은표·김동주·김종한·정경천·노왕금·이인선·유진·김병환 등등이다. 신대성은 1960년대 후반 송대관에게 <세월이 약이겠지요>를 주었고, 1976년 이 노래 <해뜰날>로 송대관이 가수왕을 차지하면서 그의 이름도 뜬다. 그가 남긴 노래는 <첫사랑>, <높은 하늘아>, <당신은 나의 운명>, <산 제비>, <먼 훗날>, 오은정의 데뷔 음반 <울산 아리랑>, <내 고향 안동> 등이다. 한때 김작사와 같이 KBS TV 도전주부가요스타와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62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고향 안동공원묘원에서 영면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나중에 난 뿔이 우뚝하다’는 말이 있는데, 청출어람(靑出於藍)에 비길만한 말이다. 21세기 트로트 열풍시대, 신곡(창작곡)은 가뭄에 콩 나듯 하고 리메이크곡들이 즐비하다. 원곡 가수들은 노래가 전하는 감정에 충실했다면, 리메이크 팬덤 가수들은 재미와 흥미에 포커싱을 한 무대연출·율동·가창에 방점을 찍었다. 오늘날 무대 위에서 옛노래를 부르는 신인 가수들이 길들인 앵무새처럼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가창력은 청출어람이라고 할만도 한데, 곡목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임인년 새해에는 국민들의 삶도, 대중가수들의 활동도, 새로운 유행가의 탄생도, 모두 다 쨍하고 해가 뜨듯이 밝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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