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몇 해 전 강원도 산골 영월 동강 가에서 한 여인네가 낙상(落傷)을 입었다. 신체일부를 크게 다친 사고였다. 응급 결에 남편은 112구급차를 요청하고 여인네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후송된다. 응급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남편은 외부 스크린으로 모니터링되는 수술 장면을 목도 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여보~ 여보야,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생시켜 미안합니다. 못 해줘서 죄송합니다. 한참이 지난 후 마취에서 깨어난 아내에게 조금 전 중얼거린 독백(獨白)을 응얼거렸더니, 여인네는 울음을 터뜨렸다. 낭군도 두 손을 마주 잡고 같이 훌쩍거렸다. 마주 잡은 두 손의 온기가 서로의 가슴팍을 데워주는 화로처럼 뜨끈뜨끈해졌다. 2021년 진성의 목청에 걸려 이 세상 잉꼬부부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유행가 <여보야>의 탄생 사연이다. 자식 낳고 살면서 온갖 고생에, 잔주름 늘어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보 여보야 나의 여보야/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식 낳고 살면서 온갖 고생에/ 잔주름이 늘어가지만/ 그래도 내가 좋다고 웃음을 주는/ 당신은 나의 천사여/ 고생시켜 미안합니다/ 못 해줘서 죄송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여보 여보야 나의 여보야/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식 낳고 살면서 온갖 고생에/ 잔주름이 늘어 가지만/ 그래도 내가 좋다고 웃음을 주는/ 당신은 나의 천사여/ 고생시켜 미안합니다/ 못 해줘서 죄송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그래도 내가 좋다고/ 웃음을 주는 당신은 나의 천사여/ 고생시켜 미안합니다/ 못 해줘서 죄송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노래 속의 화자, 온갖 고생에 잔주름이 늘어만 가는 여인네는 나의 아내다. 내 아이의 엄마다. 우리 집 안주인이다. 내 부모님의 며느리다. 내 형제간의 형수이고 제수이다. 내 누이동생의 올케이다. 허물 많은 인생, 나의 동반자이다. 해로동혈(偕老同穴), 1백 년을 같이 살다가 같은 무덤에 누워서 억년영원(億年永遠)으로 함께 돌아갈 천사이다. 배우자로 마주한 아낙과 낭군의 일생과 영원을 이처럼 명료하게 명제(命題)한 유행가가 얼마나 많을까. 아름다운 삶을 공유하는 부부는 늘 서로 간에 송구하다. 많이 미안하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녹아내려 믿음의 강 물결을 이룬다. 부부는 그 강 물결 위에 동동 떠가는 돛단배를 함께 탄 사공이고 나그네이다. 돛대와 삿대를 번갈아 세우고 밀어주는 일심동체이다.

<여보야> 노래는 2016년 신동훈이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팅이고, 신동훈이 영월 동강 낙상사고를 당하고 응급처치를 한 장본인 남편이자 가수이다. 본명이 신순철인 그는 작곡가 김중순(1938~1999)의 계보를 이어가는 뮤지션이다. 김중순은 남진을 트로트의 길로 안내한 노래 <울려고 내가 왔나>, 최병걸의 <진정 난 몰랐었네>, 임희숙의 <진정 난 몰랐네>, 채은옥의 <빗물>, 문성재의 <부산 갈매기> 등의 히트곡 노랫말을 얽어낸 신수(神手) 같은 작사 작곡가다. 김중순은 61년의 세월을 독신 뮤지션으로 살면서 작곡보다는 작사에 심혈을 기울였단다. 유행가의 묘미는 가락보다는 오선지에 드러누운 노랫말에 있음이여~. 이를 전수한 뮤지션이 바로 신동훈이다. 이의 손끝에서 탄생한 <여보야>는 통속적이면서도 누구도 저어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이다. 인생이다. 이 노래는 통속적인 삶을 모티브로 한 유행가의 진수이다. 신동훈은 1971년 <고향 소식>(고향이 그리우면 옛날을 생각하네~)으로 데뷔한 중견을 넘어선 가수다. 1990년대 이후 대중들의 흉금을 울리는 <버스 안에서>(자자)를 조탁(彫琢)해낸 뮤지션이기도 하다. 그의 좌우명(座右銘)은 뮤직 이즈 마이 라이프(Music is My life)이다. 뮤지션 제작자로도 활동하는 그는 요즈음 본인의 자작곡 <사랑 그리고 사랑>을 연승희의 목청에 싣고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 <빵빵한 내 청춘>도 그의 걸작이다.

<여보야> 노래를 2021년 리메이커 커버로 세상을 향하여 샤우팅한 가수가 진성이다. 진성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노래를 하면서 속으로 우는 가수, 노래를 들으면서 따라서 울게 하는 가수’이다. 그의 인생이 바로 유랑이고 눈물이기 때문이다. 진성은 3살 무렵 집을 나간 부모님 탓에 동냥젖(낳은 엄마가 아닌 다른 여인네의 젖을 얻어먹는 것)으로 컸고, 7~8살 때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었다. 10대가 되어 서는 유랑극단을 쫓아다니면서 트로트 신동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단다. 1960년생 진성은 마흔이 훌쩍 넘어 정상적인 가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50살이 넘어서야 인기를 누리지만 또다시 암초를 만났었다. 49세에 결혼을 한 아내 용미숙은 그의 음반을 5년 동안이나 카오디오로 틀고 다니면서도 진성이 누구인지 모르던 펜이다. 이 사실을 진성이 단골로 다니던 추어탕 집 사장님이 소개하여 부부의 연을 맺었단다. 몇 년 전 불의에 찾아온 병마와 투병을 하면서 진성은 억울했고, 불안했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다짐했다. 탤런트 김성환이 아침저녁으로 해주는 전화, 어머니 같은 전원주의 걱정, 축구동호회원 남보원의 격려가 재활의 지팡이가 되었단다. 부안군 행안면 출생, 진성철. 그가 태어난 시절도 보랫고개에서 벗어난 시기가 아니다. 하루 3끼니를 떼우기도 어렵고 배를 채우기는 더욱 어려웠다. 밥그릇에서 쌀알을 볼 수 있는 날은 추석과 설날, 그리고 조상님의 제삿날이었다. 산 사람은 초근목피로 배를 채우다가 조상님 덕에 나물 제삿밥을 얻어먹던 시절이 그때까지 이어진다. 진성의 대표곡은 <태클을 걸지마>, <안동역에서>(안동시청 분수대 앞에서), <보릿고개>, <채석강>, <님의 등불> 등이다.

<여보야>는 가족 노래, 가정가(家庭歌)다.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 부부노래는 1940년 김정구·장세정이 듀엣으로 절창한 <명랑한 부부>가 최초의 유행가다. 그 시절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30년 차, 대한제국 43년 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21년 차이던 시절이다. ‘노다지를 파내며는 부자 될텐데/ 수천만 원 그 많은 돈 무엇에 쓰나/ 멋쟁이 양장과 구두사줘요/ 빙글 빙글 세계 일주 구경도 하지/ 노다지야 노다지야 어데가 묻혀있느냐// 노다지를 파내어서 부자 되면은/ 날 같은 건 본체만체 하실랴고 뭐/ 어여쁜 당신을 그럴리 있소/ 당신이 버린다면 나는 싫어요/ 노다지 타령 끝에 그것참 큰 싸움 나겠군// 노다지를 파내어서 부자되면은/ 새 자동차 옷 벙거지 훌쩍 벗겨서/ 당신과 단 둘이 마주 앉아서/ 서울에 장안을 빙빙 돕시다/ 노다지 공상머리 이남박 뒤집어 썼네.’ 금슬(琴瑟) 좋은 부부 노래다. 1940년 노래와 2021년 <여보야>가 사랑으로 댕글거린다.

이어진 부부노래는 1950년대 백야성의 <부부에 밤>으로부터 2022년 임영웅이 커버하는 김목경 원곡 김광석의 리메이크 노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까지 잉꼬로 살아가는 대중들의 가슴팍을 사랑·이해·용서라는 애틋한 정(情)으로 오그라들고 펴지게 한다. 이향숙의 <부부타령>, 고복수의 은퇴 공연에 부른 <노래하는 부부>, 이미자의 <부부전쟁>(기둥서방), 김용만의 <부부유정>, 고봉산의 <다정한 부부>, 강수향·김수연의 <학생 부부>, 김상국의 <십대부부>, 서영춘·백금녀의 <우리는 명랑부부>, 진송남의 <다정한 부부>, 오기택·최숙자의 <원앙의 부부>, 김상희의 <신혼부부>, 현미·한명숙의 <맞벌이 부부>, 장미리의 <부부운전사>, 임재우의 <노부부>, 안정희의 <부부 인정>, 부부듀엣의 <부부>, 아리랑 부부(박채규·양현자)의 <여보 당신>, 김목경의 <어는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머루와다래의 <아리랑 쓰리랑부부>, 윤미애의 <부부>, 신동훈의 <여보야> 등이 연대별로 이어진다. 유행가는 탄생 시대를 아물고 있는 역사의 맥락 통사(通史)로서도, 인류학적으로도 사람들의 삶을 갈래갈래 품은 역사앙상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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