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송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대표
현의송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대표

오는 4월5일은 77번째 식목일이다. 이날이 되면 한국인이 각별히 그리워하는 일본인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한국 사람의 '진정한 친구'로 살았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이다.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잣나무와 오엽송의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개발했다. 그는 이를 활용해 조선 산림녹화에 힘썼다. 이 덕분에 일본의 목재 수탈로 헐벗은 우리나라 산들은 푸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기도 광릉의 수목원도 그의 기획으로 탄생했고, 국립산림과학원 정원의 유명한 1892년생 소나무(盤松)도 1922년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그가 옮겨 심은 것이다. 다쿠미는 조선 도자기에 매료된 친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1884~1964)와 함께 조선 문화예술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조선민족미술관(후에, 국립민족미술관)의 건립을 위해 자신들이 모은 각종 민예품 수천 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은 일본인 민예운동가이며 미술평론가인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의 역할도 중요했다. 야나기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탄압에 대해 “반항하는 조선인 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일본인이다.“고 비난했다. 그는 일제가 경복궁과 광화문을 철거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반대했다.

다쿠미는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와 같은 조선 도자와 민예에 관한 책을 출간하는 등 조선 문화재 연구 성과를 담은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다쿠미는 1931년 식목일행사를 준비하다 41세의 나이로 숨지면서 “조선식 장례로 조선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이 공원에는 다쿠미 묘 외에도 한반도에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처음 심은 초대 산림과장 사이토오토사쿠(齊藤音作)의 사진과 표지판은 있다. 그의 묘지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다쿠미 묘지 옆 추모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묘역에는 그를 기리려는 한국인과 일본인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그의 고향인 일본 야마나시(山梨)현 호쿠토(北杜)시의 지원으로 정비돼 방문객이 좀 더 편히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다쿠미를 연구하는 김석권 전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수많은 임업 기술을 개발했고, 광릉수목원도 모두 다쿠미 작품인데 산림청에도, 학계에도 그를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며 "일본인이라 불편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안타까워했다. 올해는 다쿠미가 세상을 뜬지 91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기일인 매년 4월2일 노리다카·다쿠미 형제 현창회가 다쿠미 묘역에서 추모식을 개최한다.

두 형제의 고향인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의 아사카와 형제 추모회도 추모사를 보내왔다. 노치환 현창회 사무총장은 추모식에서 형 노리타카가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선을 떠나게 되자 다쿠미의 묘 앞에서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심경을 담아 읊은 시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묘에 핀 들꽃 우리에게 바치고 고이 잠들게. 언젠가 찾아와 줄 사람이 있을 테니."

아사카와 형제가 태어난 고향은 일본의 후지(富士)산 뒤쪽 미나미알프스 산 부근에 야마나시(山梨)현 호쿠도(北杜, 옛이름은 淸里)시가 있다. 전에는 이 지역을 거마군(巨摩郡) 즉 고려군(高麗郡)으로 불렀다. 이 일대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왕족들이 피신해온 도래 기마인들이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그의 고향 마을에는 2001년 아사카와노리다카, 다쿠미 형제자료관을 설립하고 한국과 일본의 우호친선을 위한 정보발신지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을 보면 약광(若光)은 고구려의 사절단으로 일본에 도착했다. 건국해서 700년간 아시아에서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라 당 연합군에 멸망하고 약광과 그 후에 망명해온 고구려 민족은 일본의 동경 근처 7개 지역(시즈오카, 야마나시, 가나가와, 치바, 이바라키, 도치기등)에 분산해서 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아사카와 다쿠미 형제는 그들의 뿌리가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구려 민족의 피가 고향인 한국으로 오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다는 고백을 종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평양전쟁 후 이 지역에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폴랏슈가 이곳에 와서 병원 농장, 농업학교 ,보육원을 건설하고 청년들에게 신앙심과 교육으로 일본재건의 거점이 되도록 공헌했다. 그는 전쟁으로 적국인 일본에 와서 전쟁 전후를 통해 거주하면서 인도주의를 몸소 실천한 영적 지도자의 흔적이 많이 녹아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영향으로 아사카와 집안은 감리교 신자가 되었다. 오래전부터 이 지역은 고구려족이 들어와 살면서 명마의 산지로 알려졌다.

이 지역에서 태어난 아사카와 노부다카(淺川伯敎)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형제는 한국의 문화와 예술 산림녹화부문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형 노부다카는 한반도에 와서 조선도자기의 조사연구에 생애를 바쳤다. 조선도자기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는 조선이 좋아서 조선 사람을 사랑하고 조선의 산야와 민예의 연구조사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의 동생 아사가와다쿠미는 조선임업시험장 기사로서 한반도의 산림녹화를 위해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형 노부다카는 1913년 조선의 미술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의 집과 논 밭을 모두 매각하고 서울 남대문 공평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의 동생 다쿠미는 형을 그리워하다가 1914년 근무하던 아키다 임업시험장을 퇴직하고 조선 총독부의 직원이 되어 양묘실험과 조림의 업무를 담당하고 소나무의 양묘에도 성공했다. 형제는 조선민족미술관의 설립계획을 수립하고 조선의 도요지를 전수 조사해서 채집한 도자기 파편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의 형 노부다카는 `이조 도자기 요적일람표`를 저술했다.

아사카와 다쿠미를 애도하는 글이 인간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1934-1947년 까지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적도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다쿠미는 조선인 동료 임업시험장 직원의 자녀에게 학자금을 지원했다. 한복바지 저고리를 입고 음식도 한국식을 먹었고 한국어도 유창했다. 술도 항상 막걸리만 마시고 그의 관사는 한국인 동료들의 클럽 같았다.

바지저고리 한복을 입고 나막신을 신고 긴 담뱃대를 물고 밀대 모자를 쓰고 세끼로 짠 꼴망태를 등에 메고 시장에 가서 조선인의 골동품, 도자기를 사 모았다. 그런 괴상한 모습 때문에 일본 순사의 조사를 여러 차례 받은 적도 있다. 다쿠미 자신의 돈으로 부족하면 빚까지 얻어가면서 작품을 구입해서 조선민족미술관에 도자기와 공예품 3천 점과 도자기 파편 30상자를 기증했다.

어느 날 그의 일기에는 “피곤해 지친 조선인이여 남의 흉내를 내기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것을 지키고 있으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만이 아니다 ”라고 기록했다.

그는 평상시에도 늘 이런 말을 했다고 그의 친구들은 전한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친선은 정치와 정략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보다는 조선과 일본의 서로 문화와 예술을 상호 교류함으로서 가능할 것이다 ”고 했다.

동생 다쿠미는 조선의 미술 공예 임업에 관한 많은 논문을 남겼다. 그가 저술한 <조선의 밥상(膳)>은 민족미술관에 보관되어있으며 대단히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1931년 4월 2일 식목일 기념식을 준비하다가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망우리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인이 일본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했던 다른 사례도 있다. 즉 일본 최초의 선교사 노리마쓰 마사야스(1863-1921)는 수원에 동신교회를 설립하고 조선인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가나카와(神奈川) 현(縣)청 공무원으로 살아가던 중 망명중인 박영효를 만나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는 설도 있다(일본기독동신회100년사). 목포에서 평생을 전쟁고아를 키웠던 다우치치쓰코(田內千鶴子)와 독립운동가 박열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던 그의 아내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했으면 좋겠다. 박열과 부인 가네코후미코는 일본에서 반일활동을 주도했다. 이때 재판을 받으면서 박열은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관대를 , 그의 부인 후미코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마 이렇게 까지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는 그의 선조의 뿌리가 고구려인이고 고구려인의 피가 흐른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고구려 민족의 피가 그들 형제를 선조의 고향 한국으로 오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고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지만 1300년 전에 나누어진 피는 어떤 문화와 환경에서도 한 민족의 특징을 유지하며 면면히 흘러왔다는 증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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