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강호동양학자·작가
조용헌 강호동양학자·작가

기천문의 박대양 진인. 그는 5세때부터 스승의 손에 이끌려 설악산에서 살았다. 산속에서 거의 구석기 시대 원시인처럼 살았던 박대양에게 속가의 어머니가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양양에 살고 있던 이모를 통해서였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어린아이를 언니에게 떠 맡기고 서울로 가서 식모살이를 했던 박대양의 어머니. 6.25 전쟁 직후는 한국사회가 난리 부르스였기 때문에 개인들의 삶은 각양 각색으로 박살난 상태였다. 산중의 굴속에서 16년 동안 생식을 하면서 스승인 원혜상인으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무술 연마에 집중했던 박대양은 이모를 통해서 서울에 어머니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산을 결심했다. “산을 내려가서 어머니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한 3년만 네가 더 수련을 하다가 내려갔으면 좋겠는데. 꼭 지금 내려 가야 하겠느냐?” “어머니 생각이 그렇게 납니다. 어머니를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내려 가는수 밖에 없다. 속세로 내려가거들랑 조심할 게 있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거라!”. 

인적이 드문 산 속에서만 생활을 했으니 사회생활을 전혀 몰랐던 제자를 걱정했던 스승의 마음이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돈과 사기당하는 생활의 연속이 아니었겠는가! 박대양은 걸어서 서울로 왔다고 한다. 설악산에서 걸어서 서울까지 온 것이다. 주로 밤에만 걸어서 왔다고 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였다. 밤에 걸어서 걸어서 서울로 왔으나 어머니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발길 닿는데로 흘러오다가 계룡산에 오게 되었다. 이때가 1970년대 초반이나 되었을 것이다. 박대양의 나이 22-3세 쯤이었다. 정처 없는 일자무식 떠돌이 청년을 받아줄 곳은 계룡산과 불교의 암자였다. 우리사회 밑바닥 인생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곳은 산과 불교였다고나 할까. 박대양은 계룡산 신도안 쪽에 있는 용화사(龍華寺)라는 절에 머물게 되었다. 근방에 암용추와 숫용추라는 명소가 있었다. 용화사는 암용추 쪽에 있었다. 소문은 나게 마련이다. ‘신도안 용화사에 무술하는 고단자가 있다’는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지만 입소문은 나게 마련이다. 

전국 여기 저기서 무술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용화사에 모여들게 되었다. 무술을 하는 사람들은 쎈 상대를 만나보고 싶어하고, 상대가 쎈지 어떤지는 몸으로 붙어봐야 한다. 그러니 한판 승부를 피할수 없다.  어느날엔가는 합기도 고단자가 2명이 찾아왔다. 합기도 고단자가 절에 와보니 동자승 같은 조그마한 체구의 스님이 있을 뿐이었다. 키가 160센티 정도의 체구이니 합기도 고단자가 보기에 ‘저 정도는 쉽게 제압하겠는데. 무슨 무술 고단자라고 그러지?’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고단자라고 소문은 나 있으니 일단 말은 약간 겸손하게 하는 수 밖에 없다. “무술을 배우고 싶어서 왔소” “못 배운다. 여기는 숙식을 할 방이 없다. 당신은 무슨 무술 했냐?” “합기도 했다. 한번 대련을 하고 싶다” “그렇다면 시간 끌거 없이 지금 하자. 2명이 한번에 덤벼라” 2대1로 덤볐던 합기도는 개박살이 났음은 물론이다. 

합기도 2명은 박대양에게 무수히 얻어 맞았다고 후일 진술하였다. 정신 없이 얻어 터졌다는 것이다. 하늘을 붕붕 날라다니면서 발차기를 하는데 피할 수가 없었다. 이쪽에서 주먹을 뻗으면 바람같이 빠르게 피해 버렸으니 말이다. 사람이 얻어 터지면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무술계는 위계질서가 엄격한 것이다. 덤벼 들었다가는 피박살이 나기 때문이다. “개박살이 났으니 이제부터 무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방은 없고 여기 부엌에서 기거할 수 있겠느냐. 그게 가능하다면 지금부터 여기서 배워라!” 이렇게 해서 이 합기도 유단자 2명은 6개월간을 용화사 부엌에서 잠을 자면서 박대양으로부터 무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이 가운데 1명이 후일 불교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나중에 캐나다에 가서 포교를 하였는데. 이 캐나다 스님이 계룡산의 박사규 2대 문주를 찾아와 이야기 해준 회고담이다.     

용화사에 어느날 중년의 여자 보살님이 하나 찾아왔다. 보살님이라고 하면 무속인이었다. 신당을 차려 놓고 점도 쳐 주고 가끔 굿도 하는 보살이었다. 이 보살의 신발 선생이 암이 걸렸다. 신발 선생 암을 고쳐 볼까 하고 여기 저기 수소문 하던 중에 신도안 용화사에 신통한 동자승이 있다고 하니까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박대양은 이 보살을 만나지 않았다. 문도 열지 않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보살은 3일간을 문 앞에서서 졸랐다. “수행을 하고 도를 닦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 목숨을 살리는게 보시 아닙니까?” 3일간 이렇게 졸라대면서 압박을 가하니까 마침내 박대양도 허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암 걸린 사람이 찾아 오니까 박대양은 손으로 환자의 몸 이곳 저곳을 살짝 대곤 하였다. 그러면 그 자리는 벌겋게 자국이 났다. 인두로 지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당시 박대양의 손바닥에서 나오는 장력(掌力)이 그렇게 강했다는 의미이다. 몸 안에 양기가 충만해 있으니까 그 양기가 환자의 암세포를 녹여 버린 셈이다. 암세포는 열에 약하다. 충만한 양기야 말로 레이져 총이었다. 옛날 도인들 호를 보면 純陽子, 復陽子, 全陽子 같이 양(陽)자 들어간 호가 많다. 양기로 가득 찼다는 뜻이다. 이 양기로 암세포를 지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국이 인두 지진 것처럼 벌겋게 남는다. 이렇게 15일을 지져 대니까 그 암환자는 암이 낫고 말았다. 당시 설악산에서 막 내려온 상태에서 계룡산의 청석 기운을 보강하니까 그 내공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였다. 

설악산 바위하고 계룡산 바위는 질이 다르다. 계룡산이 더 단단하다. 산의 싸이즈는 설악산보다 작지만 돌의 기운은 계룡산이 더 강한 것이다. 이런 시기에 도인을 만나는 것도 그 사람의 인연이다. 하지만 이 동자승 박대양은 주소도 없고 호적도 없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무적자(無籍者)의 신분이었다. 박대양은 용화사에 있다가 갑사 뒤의 진장암(眞藏庵)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지금은 이 암자가 없어졌다. 진장암에 머물던 박대양은 아침 저녁으로 수련을 하였다. 그 수련은 나무 가지를 밟고 있다가 다른 나무로 점프하여서 그 나무의 가지를 밟고 다니는 훈련이었다. 보통 사람이 보기에 이런 모습은 너무 신기하고 오싹한 장면이기도 하였다. 이 수련 모습을 목격했던 사람 가운데 한명이 공주 경찰서에 간첩으로 신고를 하였다. ‘북한의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 지금 진장암에 있다’. 공주경찰서에 가게 된 박대양의 문제는 주소지나 호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박대양이라는 이름도 그때는 없었다. 나중에 지은 이름이다. 호적이 없다는게 말이 되는가! 이건 간첩이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박대양은 공주 경찰서에서 간첩 조사를 받아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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