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해후와 상봉은 어찌 다른가. 오랜만의 우연한 만남과 긴 세월이 흐른 뒤이지만 다시 만날 기약의 끝에 매달린 마주침이 다름이다. 오랜만의 얼굴 마주함은 같지만 서로 간에 남모르는 언약이 있었는가가 다른 곡절의 까닭인데, 이는 둘만이 알고 있는 밀어(密語)이다. 서로가 깐부 시절에 마음의 손가락을 걸고 한 약조이니, 그 누가 그들 마음 판에 새긴 글자를 읽어낼 수가 있으랴. 참으로 묘하고 기이한 인연 방정식에 매달린 사연이다. 이런 절묘한 감흥을 얽어낸 노래가 김진용이 노랫말을 얽고 고성진이 가락을 엮은 <메밀꽃 필 무렵>이다. 허공중에 뜬 달을 향하여 낭송하는 시가(詩歌)와 같은 이 곡조는 미스터트롯 미(美), 감성 가객 이찬원의 목소리를 타고 그의 팬덤 찬스(CHAN's)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고, 귓속을 호사시키고 있다. 슬픈 초승달이 기울면, 하얀 메밀꽃 길 따라서 나는, 다시 그대를 찾아가리라. 처음 가는 세상, 나 길 잃을지 모르니, 그대가 마중 나와 주신다면 얼마나 좋으련~.

내가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 / 꿈에 한 번 나오질 않아 / 비 내린 강가에 연어 떼처럼 / 돌이킬 수 없는 내 사랑 / 내가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 그대 울던 모습만 남아 / 소란한 밤사이 별똥별처럼 / 내 마음에 콕 박힌 당신 / 새끼손가락 걸고 영원을 약속했던 / 내 사랑은 지금 어디에 / 슬픈 초승달이 기울면 / 하얀 메밀꽃 길 따라서 / 그댈 찾아 떠나가겠소 / 처음 가는 세상 나 길 잃을지 모르니 / 그대가 꼭 마중 나와 주오 // 그대 떠나던 그 날의 아침은 / 귀뚜라미마저 조용해 / 떠나는 발소리 하나 없었던 / 마지막 내 당신의 모습 / 새끼손가락 걸고 영원을 약속했던 / 내 사랑은 지금 어디에 / 슬픈 초승달이 기울면 / 하얀 메밀꽃 길 따라서 / 그댈 찾아 떠나가겠소 / 처음 가는 세상 나 길 잃을지 모르니 / 그대가 꼭 마중 나와 주오 / 그대가 꼭 마중 나와 주오.

영락없는 이별곡이다. 영원을 약속했지만, 영원으로 이어지지 않은 비련이다. 아니 영별곡(永別曲)처럼 가슴에 녹아내리는 까닭은 왜일까. 새끼손가락 걸고 영원을 약속했던 내 사랑은 어디에...  슬픈 초승달이 기울면 하얀 메밀꽃 길을 따라서 찾아 나서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곳은 이승일까 저승일까. 애청자들 감흥의 끝자락은 어디일까. 처음 가는 세상 나 길 잃을지 모르니 그대가 꼭 마중 나와 주오. 노래 속 주인공(당신)이 처음 가는 세상, 이 마디에서 비장한 마음이 든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다시 만날 소망이 남아 있음이 이 노래 <메밀꽃 필 무렵>의 메시지다.

노래 속의 하얀 메밀꽃이 핀 길은 어디일까. 초승달이 기울고 있는 그곳, 서울과 부산 간(間) 절반의 거리에 놓여 있는 가을바람 고개 추풍령일까. 먼 옛날 추풍령은 백령(白嶺)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산, 능선에 걸린 하얀 색깔 밭 전경에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영동군 추풍령면과 김천시 봉산면을 있는 221m의 고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나뉘는 이곳에는 예로부터 산 능선 자락 갈피마다 오솔길들이 걸려있었단다. 그 길섶에는 밤이슬처럼 아롱졌다가 이지러진 못다 한 사랑 이야기들이 매달려 있을 텐데...  노랫말을 얽어낸 주인공 김진용의 가슴팍 속내가 궁금하다. 떠나는 발소리 하나 남기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 당신은 누구였을까.

<메밀꽃 필 무렵> 소설이 이 대목에서 꼼실거리며 엇대인다. 장돌벵이 허생원이 조선달과 동이와 같이 봉평장에서 70리 길인 대화장을 향하여 걸어가던,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그 길일까. 장돌벵이 허생원은 먼 옛날 하룻밤 애틋한 정을 쌓은 성서방네 처녀를 생각하고, 왼손잡이 동이가 사생아를 낳고 쫒겨났다는 자기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줄줄이 풀어놓던 그 길일까.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닿을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리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허생원은 동이의 말을 들으면서, 동이가 자기와 성서방네 처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임을 인식하고, 대화장을 파한 뒤에 곧바로 제천장으로 향하리라는 예정(마음다짐)을 하는데...  이 대목이 노랫말 ‘그댈 찾아 떠나겠소’와 엇대인다. 처음 가는 길 같은 설렘을 안고 갈 길, 첫사랑을 찾아 나설 그 길.

아내와 딸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냈던 비운의 문객 이효석(1907~1942. 봉평 출생)의 영민한 기억의 원천은 어디였을까. 그는 1914년 8세경에 고향 봉평을 떠나 100리길 밖 평창읍내로 유학(평창공립보통학교)을 나온다. 이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마친다. 이후 이효석은 1914년생, 함경북도 경성 출생으로 동성동본이던 이경원과 1931년 결혼을 한다. 이즈음 조선총독부 검열계에 일자리를 얻지만, 곧 퇴직을 하고 처가의 고향 경성으로 이주를 하였고,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뒤이어 1936년 발표한 소설이 『메밀꽃 필 무렵』(원제목, 모밀꽃 필 무렵)이다. 노래 제목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이름패다. 이 소설은 이효석이 8세까지 살았던 강원도 평창 봉평장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서 쓴 글이란다. 그는 늘 스스로를 ‘가난벵이 작가’라고 했었단다. 1940년 아내와 어린 자식을 병으로 잃은 이효석은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1917~2003)과도 인연을 맺었었단다. 왕수복은 24세 이효석은 34세쯤이다. 그 시절 왕수복은 이효석에게, ‘나는 늘 걱정이예요. 당신과 대화할 때, 나의 지식이 짧아서 혹여 답답해 할까봐. 그리고 당신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천하고 무식한 기생 애인으로 여겨져, 당신이 나를 잠시라도 부끄럽게 여길까봐서요.’라는 말을 했단다. 이때 효석은 그녀에게 가만히 윌트 휘트먼(1819~1892)의 시를 들려주었단다. ‘태양이 그대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메밀꽃 필 무렵> 노래는 필시 숨겨진 상봉 언약의 사연을 머금고 있으리라. 그 언약의 모티브가 작사가의 뇌리를 조탁했으리라. 이 노래를 절창한 이찬원은 ‘대구의 조영남’으로 불리다가 서울로 온 가객이다. 찬또배기, 훠얼~ 훨 덩실덩실 하늘을 나는 듯한 가수다. 1996년 울산(울주)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자랐다. 찬또배기·청국장 보이스·찬또위키라는 별명을 달고 노래를 한다. 찬또배기는 진또배기 노래에서, 청국장 보이스는 구수한 절창에서, 찬또위키는 연예인들의 신상을 백과사전처럼 잘 꿰차고 있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대구선원초·성곡중·경원고를 거쳐 영남대 경제금융학과 휴학 중이다. 그는 13세때 스타킹에 출연(예명 질러보이)해 트로트 신동으로 통했고, 미스터트롯에서 특유의 구수한 목소리로 최단기간 올 하트를 받았었다. 그의 아버지는 대구 용산동에서 막창집을 운영하고 있다. 2008년 전국노래자랑, 대구 중구편 우수상, 2013년 전국노래자랑 대구 서구편 인기상, 2019년 전국노래자랑 경북 상주편 최우수상 수상자다. 그의 절창은 행화지월(杏花之月) 낭랑창창(浪浪唱昶)이다. 활짝 핀 살구꽃떨기에 걸린 둥근 달님이여, 넘실넘실 덩실덩실~ 우렁우렁 내지름이여. 팬카페는 찬스(CHAN's)·찬원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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