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오선지 위에 펼쳐진 음표가 담뱃불에 지져졌던 노래가 있다. 작곡가 박춘석의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가다가 떨어진 담뱃불이 불씨였다.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서 우리노래라고 불린 ‘뽕짝’바람결이 살랑거리며 일어나던 1966년의 일이다. 그해 봄날 시인 작사가 정두수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떠나가는 연안여객선 뱃고동소리를 들으며, 노랫말의 모티브를 찾고 있었다. 흩날리는 보슬비와 소금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사흘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허사였다. 종잡을 수 없는 노랫말의 단초, 하는 수 없이 돌아선 발길, 서울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 정두수는 갑자기 들려온 환상속의 뱃고동소리를 들었다. 연안부두의 이별과 상봉 장면도 뒤엉켰다. 그르면서 차를 몰아 평소 사모하던 약사 아가씨가 있는 녹번동 약국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들어 닥친 연정을 품은 남정네와 낭자의 불꽃 튀는 눈빛, 그 자리에서 그 처자로부터 받아든 한 장의 메모지 위에 즉흥적으로 노랫말을 휘갈겨 썼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고 박춘석에게 가사를 불러준다. 이 가사를 오선지에 얹으면서 박춘석은 줄담배를 태웠단다. 이것이 박춘석 작곡 999번째 곡, 남진의 절창 <가슴 아프게>가 탄생한 사연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 / 저 바다가 없었다면 /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 해 저문 부두에서 / 떠나가는 연락선을 /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 바라보지 않았으리 /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 목 메여 운다 // 당신과 나 사이에 / 연락선이 없었다면 / 날 두고 떠나지나 않았을 것을 / 아득히 바다 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 바라보지 않았으리.

노랫말이 축축하고 무겁다. 쓰라린 이별 앞에 아픈 가슴을 쥐어뜯지 않을 이가 있을까. 해 저문 연안부둣가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바라본 사람은 작사가 정두수인데, 남진의 노래를 들으면서 울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너)다. 갈매기도 목이 메인다. 이 노래의 배경지 연안부두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에 있는 연안여객터미널 일대이다. 이곳에서는 대청도·연평도·덕적도·이작도·백령도 등 서해안 100여 개 섬과 제주도 등을 이어주는 여객선이 드나든다. 중국 여러 도시로 출항하는 여객선을 탈 수 있는 국제여객터미널 일대는 연안부두라고 한다.

인천항은 우리나라 근현대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된다. 1866년 프랑스군이 침략해 온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군함이 침략해온 신미양요의 근해역(近海域)이다. 이어서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개항된 3포의 하나다. 1876년 부산포, 1880년 원산포, 1883년 제물포가 개항의 본거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도 인천항이다. 밀물과 썰물의 물 때 높이는 7~11미터나 된다. 제물포라는 이름도 그렇다. ‘거친 들판(맷골)의 물로 둘러쌓인 고을’이라는 의미, 여기서 제(濟)는 강 건널 제이고, 물(物)은 만물 물이다. ‘강 건너에 만물이 널려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재해석을 해 봄도 맛깔 나는 음유이리라. 인천시(인천부)는 해방 직후이던 1945년 10월 10일부터 단 17일 동안 제물포시로 불린 적이 있었지만, 곧 인천부로 환원하였다. 무슨 사연이 매달려 있을까, 역사의 갈피에서 답을 찾을 길이 묘연하다. 이처럼 역사의 곡절을 품고 있는 바닷가,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오고가는 배는 유행가의 노랫말로 환생하여 흘러오고 흘러간다. 이래서 유행가를 보물(유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 제목은 <낙도가는 연락선>이었다. 박춘석은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와 대중들의 가슴팍을 후벼 파는 노랫말과 제목이 엇박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제목을 바꾸기로 하고 고민을 한다. 그 시절 노래 제목은 명사로 끝나는 게 전통이었다. 하지만 과감하게 부사나 형용사로 만들어보기로 하고 몇 가지 가제목을 달아봤다. 이때 최종적으로 정해진 제목이 <가슴 아프게>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대중가요 100년사에서 최초의‘부사형 노래 제목’인 동시에 ‘박춘석의 999번째 곡’이라는 타이틀을 단 절창이다.

박춘석(1930~2010)은 1950년대 천재 재즈피아니스트로 등장하여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뿔테안경을 낀 채로 화려한 악상과 연주를 선보였다. 본명은 박의병, 1930년대 서울에서 조선고무회사를 운영하던 집 아들이다. 그는 4살 때부터 풍금을 쳤단다. 봉래소학교 경기중학(경기고)을 거치는 동안 특별한 지도 없이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독파했단다. 이 귀재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1948년, 세 살 위 길옥윤의 요청에 의한 명동 황금클럽 피아노 연주였단다. 경기중학교 4학년(고교1년) 때다. 그는 1960년대 패티김(1938~. 본명 김혜자)을 미8군 무대로 안내한 길잡이이자, 그녀에게 연정을 품은 남정네였다. 패티김의 미8군 무대 출연과 데뷔는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주인공 가수 이해연의 남편 베니 김(본명 김영순, 화양기획)과의 합작이었단다. 그 후 패티를 연모하던 박춘석은 한평생을 홀로 살다가 가슴 아프게 이승을 등졌다. 뇌졸중과 투병한 16년의 끝자락 81세, 세월이 가도 가슴 속에 품은 사랑의 온도계는 식지 않는다. 사랑의 뜨거운 상처를 가슴에 품은 그의 평생 동지는 바로 작곡이었다. 연인(戀人) 대신 연곡(戀曲)을 택한 것이었다. 1952년 미8군 무대에서 피아니스트로, 1955년 백일희가 부른 <황혼의 엘레지> 작사·작곡으로 데뷔한 그는 이후 작곡에 전념하면서 <비 내리는 호남선>, <마포종점>, <초우>, <한 번 준 마음인데>, <섬마을 선생님> 등 2천7백여 곡을 남겼다. 곡절마다 사연마다 연인을 향한 인생이 매달려 있다.

<가슴 아프게> 노래는 1967년 영화로 승화되었었다. 박상호 감독으로 남진(성진 역)과 문희(경아 역)가 열연했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련, 재일교포 오르가니스트 경아는 모국(우리나라) 방문 공연을 펼치면서 인기가수 성진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공연이 마무리 된 후 경아는 못다 한 사랑을 남겨둔 채 현해탄을 건너간다. 떠나가는 연인을 배웅하는 안타까운 성진의 손사레, 그 귓전으로 <가슴 아프게> 노랫말이 자랑거린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이 영화는 노래가 먼저였는데, 애당초 영화 주제가를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일화도 품고 있다. 하동 태생으로 부산 동래고를 거쳐 서라벌예술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작사가 정두수가 바람결에 남긴 말이다. 통통통~ 울리는 뱃소리가 들리는 영화 주제가 청탁을 받고, 그는 부산 광안리 바닷가를 연상했었지만, 거리가 가까운 인천 연안부두 달려갔다는 사연 뒤에 매달린 창작 에피소드다.

<가슴 아프게>를 절창할 당시 남진은 20세였다. 본명 김남진, 그는 1946년 목포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목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온 어느 날, 한국일보 정홍택 기자를 우연히 만났다. ‘자네 가출했지? 네! 부모님들이 가수 되는 걸 하도 반대하셔서 나와 버렸습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공부나 하지 그래.’ 당시 두 사람의 대화다. 남진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후 2년간 한동훈음악학원에서 가수의 길을 연마했고, 1965년에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하였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