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아무런 대책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텅 빈 그리움이 당신을 찾아온다면 그대는 어찌하오리까. 어허~ 추억과 기억의 주머니 속에 도사리고 있던 지난날의 아련함이여~. 그런 날이 오신다면, 낭만 가객 최백호가 내지른 <낭만에 대하여> 노래를 감흥하시라. 그러면 또 다른 그리움이 몽실거리며 찾아오실 테니~. 가수 최백호의 목청에 걸린 노래는 늘 축축하다. 거칠거칠하다. 백호만의 마력(魔力)이다. 그래서인가, 트로트 스핀오프(spin off. 파생 무대) 시대 여기저기에서 그의 노래가 불려 나온다. ‘따르릉~ 따르릉 ~ 네, 경기도에 사는 정수랑입니다. 트바로티 김호중에게, <낭만에 대하여>를 신청합니다.’ 사랑의 콜센타 무대에서 애청자가 청한 신청 곡이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나 홀로 앉아서 도라지 위스키 한 잔을 홀짝거리면서 들어야 할 노래, 이제 와 세삼 이 나이에 미련의 달콤함이야 있으랴 만은~. 그래도 주체하기 서러울 만큼 송송거리는 푸르른 날의 미련은 그립기만 하다.

궂은 비 내리는 날 /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 새빨간 립스틱에 /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 마는 / 웬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김호중이 절창한 웰컴 투 호중 다방, 걸쭉한 테너 색소폰 전주에 걸리는 트바로티의 가랑 찬 목청에 ‘궂은 비 내리는 날~’ 이 걸리는 순간 객석은 술렁거린다.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노랫말이 끝나자 일동 기립박수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미련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시청자들의 가슴이 눅눅하게 젖었다. 2절로 이어지는 저 무거우면서도 흥겨운 감흥을 어이하랴. 가히 원곡 메시지를 능가하는 오락 흥이다.

밤늦은 항구에서 /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 가에서 /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들어 보렴 / 첫사랑 그 소녀는 /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 보렴 /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 웬지 한 곳이 비어 있는 / 내 가슴에 /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 낭만에 대하여.

그대에게 다시 돌아올 사람은 뉘 신가. 있기나 한가. 첫사랑 그 소녀는 어느 하늘 아래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을까. 하늘 여행을 그대보다 먼저 떠나셨다면 어이 하리야, 나만의 첫 순정 가희(歌姬)처럼. 다시 못 올 것에 대한 서러움이 자랑거린다. 그래서 <낭만에 대하여> 노래는 중년 남·여성의 가슴팍을 후벼 파고, 첫사랑에 대한 향수에 흠뻑 젖게 해준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노랫말이 일품이다. 창 밖으로 궂은비가 내리는 날, 미스 김이 헤프게 웃음을 짓는 옛날식 다방. 우수에 젖은 색소폰 소리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네모진 탁자 위엔 도라지 위스키 한 잔이 놓여 있다. 인생의 달고 쓴 맛을 합쳐놓은 한 잔의 술, 첫 모금에 아물거리는 첫 키스의 감칠맛 같은 노랫말이다. 늦은 밤, 부산항 선창 가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는 어이할꼬. 그대~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가고 계시나. 가끔이라도 잿빛 머리카락 성컬거리는 내 모습 떠올려 주시리.

<낭만에 대하여> 노래의 모티브는 한 단어 낭만이다. 영어로는 romance이고, 중국식 한자로는 浪漫이다. 낭은 물결 낭(浪)이고, ‘유랑하다·표류하다·터무니없다·허망하다’는 의미다. 만은 흩어질 만(漫)이다. ‘흩어지다·질펀하다·방종하다’는 의미다. 허망한 생각의 물결이 파도처럼 나부낀다는 의미이다. 참으로 대책이 없는 단어이다. 이 말은 프랑스어 로망(roman)이 어원인데, 대중적인 말로 쓰여진 의미는 설화(說話)라는 뜻의 속어(俗語)였단다. 그래서 로망이라는 말은 소설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 말이 17세기 중엽에 영국으로 건너가서, 기이하고 공상적이며 감성적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쓰인다. 흩어지는 물결 같은 낭만, 아무런 대책도 마련도 없는 텅 빈 가슴팍 같은 공허한 감성이다.

1994년 44세의 최백호는 어쩌자고 이 노래를 지어서 불렀나. <낭만에 대하여>, 그가 처음으로 삶의 터무니없음을 깨달은 것일까. 그 깨달음이 가사와 가락과 축축하고 거칠거칠한 목소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추억을 되새길 감수성에 풍구(風甌)질을 한다. 최백호는 1950년 부산(기장군 장안면)에서 출생하여 가야고를 졸업했으며, 1977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하였다. 그는 흔히 가을 남자, 고독과 낭만의 가수, 낭만 가객으로 불린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6.25 전쟁 중 낙동강 방어선으로부터 북진을 해가던 시기에 UN군으로 참전한 터키군 트럭과 충돌한 사고였다. 1950년 11월 10일,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던 중 경상북도 김천 황간 부근에서 북상하던 작전 차량(트럭)과 충돌했다. 백호의 아버지 최원봉(1922~1950)은 자유당 시절, 29세의 최연소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때문에 어머니를 따라 어릴 적부터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 시절 노래보다는 그림을 더 좋아했다. 무지개빛 같은 꿈도 화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인가, 고희를 넘긴 지금도 그림을 전업 화가처럼 그려낸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미대 지망생이었다. 그런 꿈이 틀어지게 된 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가 노래를 부른 건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였다. 딱히 노래를 배우진 않았어도 평소 통기타를 치며 흥얼거리던 그의 노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그는 통기타 라이브 술집을 하는 친구네 집에서 노래했다.

그렇게 음악 살롱을 전전하다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의 주인공 하수영(1948~1982. 청주 출생, 부산 성장)을 만나게 됐고, 그의 주선으로 서울로 와서 노래하게 된다. 그는 당시 대마초사건(1975.12.3.~.)으로 가요계가 치명타를 입고 휘청거리던 1976년 가을, 데뷔곡이자 히트곡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가요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이 노래는 암 투병을 하던 그의 어머니에게 바친 노래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어머님의 삶이 단풍이 지고 눈이 오는 겨울까지 이어지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아들(백호)의 마음을 얽은 노래였다. 이후 <입영전야>, <그쟈>, <영일만 친구> 등을 연속 히트 치며 인기가수 대열에 올랐다. 그즈음 국민배우 김자옥(1951~2014)과 결혼했다. 1980년의 추억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3년 이혼 후 한동안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1984년 지금 아내, 손소인을 만나 방황의 끝을 맺는다. 손 씨를 만난 건 친구 집에서였다. 친구 부인의 친구인 손 씨는 최백호보다 10년이나 아래다.

<낭만에 대하여> 노래는 최백호 자작곡으로 부른 곡이다. 노랫말 사연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최백호는 군 복무를 1년 만에 의병전역(依病轉役)하였다. 그때 부산 동래시장 모퉁이를 지나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허름한 2층 다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곳에서 색소폰 연주곡을 접한다. 에이스 캐넌(1934~. 미국 그레나다 출생)이 연주한 <로라>(La tristesse de Laura)였다. 이 노래는 영화, <여름날의 그림자> 주제곡이다. 서양의 장송 곡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간혹 축가로도 연주를 한다. 비 내리던 날 부산 동래시장 2층 다방, 그날의 감흥이 20여 년 뒤 <낭만에 대하여> 노래의 모티브가 되었다. 노랫말 도라지 위스키는 일본 산토리사 도리스 위스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판매금지 된 뒤, 우리나라 어느 양조사가 비슷한 이름으로 만들었던 기타재제주, 1976년경 단종 된 술이다. 이 당시에는 위스키가 비싸서 홍차 한 잔에 위스키 한 잔을 섞어서 위티(위스키+티)로 팔던 시절이다. 이렇게 탄생한 <낭만에 대하여> 노래는 21세기 사랑의 콜센타에서 김호중의 목청에서 되살아났다. 웬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듯한, 텅 빈 낭만의 목청으로.

김호중은 성악의 산 능선에서 트르트의 강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종횡무진을 한 가요계의 노마드(nomad. 유목민)다. 1991년 울산에서 출생하여 김천예술고·한양대·독일을 거치며 성악을 공부한, 영화 <파파로티>의 실제 주인공이다. 초등 3학년 때 부모 이혼으로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방황하던 중학교 시절, <보고싶다> CD를 사기 위해 찾은 음반매장에서 우연히 네순 도르마(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웅장함에 매료되어 성악을 시작했다. 2008년 할머니가 대장암으로 타계하면서, ‘하늘에서 지켜볼 테니 똑바로 살라’는 말씀을 유언으로 남긴다. 인생살이는 운명(運命)과 숙명(宿命)의 연속, 운명과 숙명을 합치면 신명(神命)이다. 김호중의 반전 인생은 운명인가 숙명인가, 그의 노래는 허공지살(虛空之虄) 활활창창(活闊敞唱)이다. 허공중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이여, 더 멀리 더 넓게 퍼져간다. 2020년 <미스터트롯> 4위. 김호중 팬카페는 <트바로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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