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서울에 탱고 리듬이 처음으로 컹컹거린 때는 언제였을까. 바일리 꼰 꼬르떼(baile con corte), ‘멈추지 않는 춤, 만남의 장소, 특별한 공간’이란 의미도 품고 있는 이 묘악(妙樂)의 가락. 이는 1880년대로부터 1920년대를 이어오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부둣가 뒷골목을 쿵쾅거린 발장단이 음원(音源)이다. 그 시절 흔하지 않았던 사창(私娼) 거리의 여인네를 꼬드기기 위한 남정네들이 경쟁적으로 펼친 격렬한 몸 사위였다. 이런 탄생 사연을 품은 탱고 가락은 1930년대 후반 서울의 거리에 풍성거렸다. 꾀꼬리 가수 황금심의 목청을 타고 낭실거린 <추억의 탕고>가 그 증거다. 노래 제목이 탱고도 아니고 탕고였다. ‘야자수 그늘 밑에서/ 둘이서 놀던 그때~.’ 문화의 서세동진(西勢東進) 속도를 헤아려 볼 수 있는 바로미터 유행가이기도 하다. 이후 60여 년의 세월 자락에 매단 방실이의 노래가 <서울탱고>이다.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 붙박이로 살아가는 나그네의 고단한 삶을 위무한 절창. ‘내 나이 묻지 마세요, 이름도 묻지 마세요~.’

내 나이 묻지마세요 / 내 이름도 묻지마세요 / 이리저리 나부끼며 / 살아온 인생입니다 / 고향도 묻지 마세요 / 아무 것도 묻지마세요 / 서울이란 낯선 곳에 /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가 / 모두가 부질없는 것 /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 인생은 구름 같은 것 / 그냥 쉬었다가 가세요 / 술이나 한 잔 하면서 / 세상살이 온갖 시름 / 모두 다 잊으시구려.

노래 속 주인공, 서울 사람의 삶이 고단하다. 그 삶의 마디마디에 매달린 한숨은 얼마나 쉬럭될까. 이 노래 <서울탱고>의 메시지는 1960년 이후 이농향도(離農向都) 바람결에 실려 서울로 온 사람들과 1980년대 강남개발에 곁눈질하면서 몰려와 각박한 삶을 견디어 살아가는 이들을 위무한 시대 묵시 유행가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심장이다. 서울의 역사가 궁금하다.

이 서울에 사람들이 20만여 명 이상 모여서 살기 시작 한 때는 지금부터 630여 년 전이다. 1392년 고려의 마지막 역적 이성계가 쿠데타로 왕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씨 왕조를 세운 뒤, 이듬해 남경(南京, 당시 한양)으로 나라의 수도(首都)를 옮기면서다. 당시 정도전(1342~1398. 영주 출생)은 유학의 5대 정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골간으로 서울 외곽을 설계했었다. 동대문(흥인지문. 興仁之門), 서대문(돈의문. 敦義門), 남대문(숭례문. 崇禮門), 북대문(홍지문. 洪智門), 보신각(普信閣)이다. 그 후 1930년대 중반 서울 인구는 35만여 명이었다. 이중 7만여 명이 일본인이고, 5천여 명이 그 외 다국적 외국인이었다니,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20여 년차의 서울을 상상을 해 보시라. 뒤이어 1960년대 인구는 3백만, 1980년대 강남개발을 하면서 서울인구는 급증하여 1천만에 이르고, 서울의 지경(地境)도 점차로 넓어졌음을 이해하면서, 방실이의 <서울탱고>를 감상해 보시라.

우리 민족은 특유의 생태적 관습을 품고 있다. 낯선 사람 간에 처음 만나면 첫 질문이 ‘고향이 어디냐’다. 다음은 학교, 그리고 나이를 묻는다. 통성명 뒤에 형님·아우·언니가 이어진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서울 나그네 여인이 있었다. 태진아가 부른 노래 <옥경이>의 주인공이다.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고향여자>였다. 서울이 낯설게 여겨지면, 나이를 밝히기도, 고향을 말하기도 싫어진다. 이러한 서울 나그네의 서러움은 김성환의 노래 <묻지마세요>로 이어진다. 세상 인간사야 모두가 부질없다.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다. 그냥 쉬었다가 가라. 술이나 한잔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잊으시라. 그리고 명심하시라. 섣불리 이름도, 고향도, 나이도 묻지를 마시라. 방실이가 열창한 <서울탱고>의 메시지 실마리다.

탱고라는 리듬이 생겨난 그즈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녀의 성비(性比)가 차이가 많은 남성초월(男超)의 도시였고, 부둣가의 힘든 하루 일을 마무리한 노동자들은 간간이 있던 뒷골목 사창가로 향했고, 그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춤을 겨루었단다. 그리고 길거리 여인을 춤추는 척, 껴안기 위해 거칠고 빠르면서도 유연한 동작을 익혔고, 이는 탱고 특유의 스타카토식 꺾기와 휘돌리기 악센트를 만들어냈단다. 아르헨티나의 정신으로 불리는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탱고는 플라타 강(Rio de la Plata)에 속해 있다.’라고. 플라타 강은 남아메리카 대륙 하반구를 물고 있고, 탱고는 이 흙탕물 투성이 강 물결을 닮았단다. 이 강의 건너편,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 또한 탱고의 거점이기도 하다.

<서울탱고>는 분위기 띄우는 필살가 중의 한 곡이다. 언젠가 삼성경제연구소가 각종 모임 풍속도를 그려내는 필살가(必殺歌)를 조사했었다. SERI CEO 직원과 대중문화 담당 기자들을 대상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 좌중을 놀라게 하는 와일드카드, 잔잔하게 마무리 하는 곡’을 조사했던 것. 이때 <젊은 그대, 그대로 그렇게, 어쩌다 마주친 그대, 내가, 여행을 떠나요, 첫차, 서울탱고, 영원한 친구, 낭랑18세, 밤이면 밤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날개 잃은 천사, 난 알아요, 흥보가 기가 막혀, 맨발의 청춘, 진달래꽃, 사랑(나훈아), 낭만에 대하여, 뜨거운 안녕> 등이 선정되었다. 그중에서 <서울탱고>는 고단한 서울 살이 삶을 관조하듯 표현하여 다양한 연령대의 사랑을 받았으며,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 중의 하나로 뽑혔던 것이다.

탱고가 본격적인 음악(장르·리듬)으로 인기를 끌을 무렵,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성들은 목이 긴 부츠에 쇠발톱(spur)을 달고 가우초(gaucho)라는 바지를 입었으며, 춤을 추던 여성들은 풍성한 스커트를 입었다. 그와 같은 복장으로 춤을 추려고 애쓰는 과정에 역설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동작들이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 탱고의 기본동작 밑바탕이 되었단다. 탱고의 비약적인 발전은 19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의 탱고는 경쾌하고 활기찼으며, 1915년 무렵 유럽에도 전해져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1920년대가 되자 탱고의 분위기가 바뀌어 우수의 정서를 띠게 되었다. 아울러 스텝도 실내 무도 스텝으로 부드럽게 변했다.

탱고 리듬을 세계 여성들의 가슴팍에 아롱지게 한 장본인은 바리톤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1890~1935)이다. 프랑스출신 아르헨티나 국적이던 그는 세계 투어를 통해 눅눅한 항구의 뒷골목 사연을 머금은 탱고를 아르헨티나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보물로 치환(置換)시켰다. 그리고 카리브 해로 떠나던 도중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만다. 1935년 6월 24일의 비사이다. 오늘날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말한다. ‘가르델은 지금도 날마다 점점 더 노래를 잘한다.’라고. 그곳에 가면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아바스토(Abasto) 시장에 그의 동상이 서 있고, 곳곳의 벽화에서 중절모를 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이 중절모가 방실이가 중절모를 쓰게 한 모티브일까. 중절모를 쓴 방실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오랫동안 ‘남반구의 파리’로 불렸다. 영감을 찾아 북반구에서 날아온 예술가들의 영혼의 보금자리였기에.

21세기 대한민국, 공연(公演)과 경연(競演)의 한계가 사라지고 있다. 출연자들은 장르의 한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2023년으로 이어오는 대중가요 유행가 트로트 열풍의 장이 그 현장이다. 원곡 노래 고유의 음정·박자·리듬에 리메이크 가수의 꺾기와 굴리기를 더한다. 마디 안에서의 마디와 박자 속에서의 박자를 다시 얽어서 현란한 의상과 안무가 더해진다. 변곡(變曲)과 개사(改詞)·추사(追詞)·혼사(混詞) 등 그야말로 혼융예술(混融藝術)이다. 1990년 방실이가 부른 <서울탱고>를 열창하면서, 트로트 전국체전에서 8도 올스타를 받은 박예슬이 증표다. 그녀는 ‘나 오늘 기분 째즈’라는 슬로건의 주인공, 피아니스트로 재즈보컬 활동을 하면서 트로트 경연에 참가하여, 원곡 가수의 감흥에 새 물감을 칠하는 멋의 향기를 뿌렸다.

<서울탱고>를 발표할 당시 방실이는 28세, 본명 방연순이다. 그녀는 1963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강화여고를 졸업 후 미8군 무대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무명 시절 시원스러운 가창력과 율동을 무기로 방실이와두 여자, 글래머 걸스 등 여성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86년 당시 국내 유일의 여성트리오 서울시스터즈로 <첫차>를 히트시켰고, 1990년 솔로로 전향하면서 이 노래 <서울탱고>로 인기를 누렸다. 1992년 <여자의 마음> 발표 후, 1993년에는 일본인 사업가 야마키 도시히로와 결혼하여 한동안 가요계에서 잠적하였다가 7년 만에 복귀하지만, 후에 이 결혼은 거짓이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그녀는 2003년 <뮈야뮈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과로로 발생한 뇌경색 투병을 하며 재기의 의지를 가다듬고 있다. 16년여의 긴 투병 터널에서 방실이가 벌떡 일어나, <서울탱고>를 열창할 날의 간절하게 기원한다. 고향과 나이와 출신 학교를 묻지 않는,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의 끈을 엇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 본위의 불차탁용(不次擢用)이 통습되는 대한민국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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