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니스트
장경덕 칼럼니스트

글로벌 금융시장이 블랙 먼데이를 맞지 않게 하려고 스위스 정부는 어느 때보다 긴박하게 움직였다. 일요일인 19일 스위스 대통령은 UBS의 크레디스위스 인수를 발표했다. 그는 “크레디스위스의 통제되지 않은 붕괴는 이 나라와 국제금융 시스템에 가늠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 대통령은 낯설었다. 이상한 점도 있었다. 여러 매체의 속보를 읽던 독자라면 서로 다른 대통령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알랭 베르세 대통령으로 쓴 곳이 많았지만 이그나지오 카시스 대통령이라고 표기한 곳도 여럿 있었다.

카시스는 지난해 대통령이었고 베르세는 올해 대통령이다. 스위스 연방의회는 4년 임기의 연방 각료 일곱 명을 선출한다. 그중 한 명이 입각 순서에 따라 해마다 돌아가며 각의를 주재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 제왕적 대통령은 꿈도 꿀 수 없는 체제다. 국제 이주가 지역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베르세는 175대 대통령이다. 로잔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카시스는 6년 전 연방 각료로 선출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국적도 갖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우크라이나를 방문하며 스위스의 중립국 지위를 재정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스위스 대통령은 기자조차 이름을 잘못 쓸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투자가 나심 탈레브는 그 점에 주목했다. ‘스위스 국민에게 자기 나라 대통령 이름이 뭔지 물어보고 몇 사람이나 제대로 대답하는지 확인해보라. 그들은 프랑스나 미국 대통령 이름은 알지만 자국 대통령 이름은 모른다.’ 탈레브는 지구촌에서 가장 안정적인 나라에 정부가 없다는 사실을 부각한다. 스위스는 정부가 없음에도 안정적인 게 아니라 정부가 없기 때문에 안정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과장법이다. 스위스에는 거대하고 강력한 중앙정부가 없다는 뜻이다.

스위스 연방의 26개 주(칸톤)는 독립국에 준하는 자치권을 갖는다. 그 아래에는 저마다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2000여 개의 자치 도시가 있다. ‘아래로부터의 독재’라고 할 만큼 상향식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나라다. 스위스인들은 역사적으로 큰 정부를 불신했다. 행정과 조세를 비롯한 모든 의사결정을 가능한 한 아래 단계의 자치체에 맡기는 보충성의 원칙을 지켰다. 지역 간 경쟁은 어느 한 곳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주었다. 예컨대 취리히가 너무 많은 세금을 거두려고 하면 기업들은 추크나 슈비츠로 옮겨갈 것이다. 수많은 국민투표는 대체로 스위스인들의 안정감과 절제력을 보여준다.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경제사학자 조너선 스타인버그는 이러한 상향식 사회를 오뚝이에 비유한 적이 있다. “(스위스의 정치 체제는) 밑바닥에 납을 넣은 인형처럼 쓰러질 때마다 스스로 바로 선다.” 2000년대 초까지 스위스 은행가협회장을 지낸 게오르크 크라이어는 누구에게든 지배받기를 끔찍이 싫어하는 스위스인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회계약을 고르는 스위스인들은 시장에서 가장 싼 배추를 사려는 농민들 같았다. 그들은 최소한의 정부를 갖는 대신 최소한의 자유를 포기했다.” (제임스 브라이딩 ‘스위스 메이드’)

그러나 역설은 또 다른 역설로 이어진다. 스위스가 오늘날의 선진국으로 발전한 것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마스터플랜이나 걸출한 지도자의 비전과 리더십 덕분이 아니었다. 자유롭고 개방된 체제에서 기업가의 혁신과 지역 간 경쟁이 최선의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레브의 말마따나 이처럼 대단한 성공을 이뤘다는 것은 곧 잃을 게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구 대비 거대기업 수가 지구촌 어느 나라보다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글로벌 위기에 취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UBS와 크레디스위스의 자산을 합치면 1조7000억 달러(총 운용 자산은 5조 달러)에 이른다. 한 해 GDP가 8000억 달러인 나라가 품기에는 너무나 큰 거인이다. 스위스 정부는 이번 사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이번에도 자유방임은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중앙은행은 1000억 달러 넘는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했다. 정부는 90억 달러 넘는 손실을 떠안을 수도 있다. 사태의 긴급성을 고려해 UBS 주주들의 인수 동의 절차도 건너뛰도록 했다. 외신이 대통령 이름을 헷갈릴 정도로 존재감이 없던 연방정부가 이런 일을 해야 했다.

탈레브는 단순히 위기 때 잘 버티거나 위기 후 회복이 빠른 정도가 아니라 위기를 겪을수록 오히려 강해지는 것을 ‘앤티프래자일(antifragile)’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면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하는 충격으로 오히려 혜택을 보는 스위스를 위기 때 강해지는 앤티프래자일 국가의 전형으로 꼽았다. 크레디스위스 사태를 계기로 스위스 금융시스템이나 나라 경제가 오히려 강해질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되더라도 강력한 중앙정부의 부재가 역설적으로 스위스의 안정과 발전을 불러왔다는 기존의 서사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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