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화사한 봄님께서 아리랑고개를 넘어오신다는 전갈이 왔다. 다도해 바다 기슭과 지리산 깊은 골 양지 녘에 빨노랑 꽃떨기들이 화사하단다. 내 마음의 꽃이 덩달아 피어난 듯, 가슴속에 아롱지는 향기가 콧속 잔털을 발름거리게 한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을 이해할 때 비로소 어른이 되고, 내가 거처하는 곳이 아닌, 먼 곳의 정황(情況)을 이해할 때, 사리(事理) 분별이 분명해진다. 어른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철듦의 기준점이다. 우리 가요사에 이런 봄날에 딱~ 어림 잡히는 노래가 있다. 1937년 박단마가 절창한 <아리랑 낭랑>이다. 그 시절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27년 차의 어두운 터널 속이었다. 하지만 노랫말과 멜로디는 밝고 카랑카랑했다.

이 노래를 2020년 뮤지컬배우 조혜령이 열창했다. 봄이 오는 아리랑고개, 그 고개를 넘어서 나에게로 오시는 님은, 먼 모습부터 곱상이고, 등을 보이며 멀어져 가는 님은 뒤태가 가물거리며 사라질 때까지도 밉상이다.

봄이 오는 아리랑고개 / 님이 오는 아리랑고개 / 가는 님은 밉상이요 / 오는 님은 곱상이라네 / 아리 아리랑 아리랑고개는 / 님 오는 고개 / 넘어 넘어도 우리 님만은 / 안 넘어와요.

봄은 이미 아리랑고개를 넘어오셨는데, 우리 님(나의 님)은 왜 아니 오실까. 이 님이 어서 오시기를 고대하는 맘으로, 미스트롯2 경연에서 남녘 바다마을 거제도 옥포 출생 조혜령이 이 노래를 열창했다. 그날 가수는 어른으로 거듭나고, 시청자들은 먼 옛 기억의 오솔길을 거닐었다. 생각의 징검다리를 여러 개나 건넜다.

33세 뮤지컬배우인 그녀가 자신보다 이 세상에 50여 년 먼저 온 노래 <아리랑 낭랑>을 옹달샘 물소리 같은 목청으로 열창했으니, 평양 만수대예술단원이 무대에 선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날 조혜령은 선녀 의상으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독특한 창법으로 무대를 휘저었다. 가는 님은 밉상이요, 오는 님은 곱상이라고.

달이 뜨는 아리랑고개 / 꽃도 뜯는 아리랑고개 / 우는 님은 건달이요 / 웃는 님은 도련님이지 / 아리 아리랑 아리랑고개는 / 도련님 고개 / 울어 울어도 우리 님만은 / 안 울어요.

<아리랑 낭랑> 노래 주인공 낭랑(娘娘)은 시집을 안 간, 아가씨 중의 아가씨라는 고낭(古娘)과 같은 말이다. 가수 진방남(작사가 반야월, 본명 박창오. 1017~2017. 진해 출생)이 부른 <꽃마차> 노랫말 속 아가씨와 같은 의미다. 하늘은 오랜지색 꾸냥의 귀거리(귀고리)는 한들한들~에서, 한들거리는 귀고리를 걸고 있는 꾸냥이 바로 고낭이다.

<아리랑 낭랑>은 1937년 처녀림이 노랫말을 짓고 김교성이 가락을 얽어 86년을 흘러온 곡조다. 이 노래 작사가 처녀림은 바로 작사가 반야월이고, 가수 진방남이고, 필명 박남포·옥단춘·금동선·허구·백구몽·남궁려·추미림·불로초를 사용한 같은 사람이다.

이 노래를 박단마가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녹음했다. 앨범 제목은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였으며, 1941년 백난아가 리메이크 송으로 불러, 백난아 노래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이 노래는 통상 2절로 불리는데, 3절로 소개한 자료들도 있다. 아리랑고개는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많은데, 이 낭자가 도련님을 기다리는 달뜨는 고개는 어디일까.

경사 났소 아리랑고개 / 입춘대길 아리랑고개 / 족두리에 나삼 소매 / 시집가는 아리랑고개 / 아리 아리랑 아리랑고개는 / 족두리고개 / 어찌 어찌도 좋았던 지요 / 쪼끔 울었소.

노래 속 아리랑고개는 어디일까. 고산자 김정호(1804~1866)가 간행한 병풍식전국지도첩, 대동여지도 1첩 8면에 아리랑고개가 명시되어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예전에는 정릉고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곳은 우리 민족의 혼(魂)과 얼(臬)이 베인 곳이기도 하다.

1926년 나운규(1902~1937)가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곳이기에 그렇다. 이후 아리랑고개는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이던 1930년대 중반 음식점을 차린 요리업자들이, 정릉 일대(북한산 자락)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용해 고급 요정을 꾸며놓고, 손님들을 끌기 위해, 우리 전통민요 <아리랑>에서 착안하여 아리랑고개라는 표목(標木, 간판)을 세웠기 때문에 통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리랑고개를 지나는 길은 지선도로로 서울 시내 전체 가로명(街路名) 가운데, 대로(大路)나 로(路) 혹은, 길이 아닌 아리랑고개로 불리는 유일한 도로다.

서울 중구 광희동 2가에도 아리랑고개가 있다. 신당동 쪽에 있던 고개다. 옛날 도성(都城, 4대문 안쪽)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상여(喪輿)를 동쪽 광희문(속칭, 수구문)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서 신당동 화장터나 왕십리·금호동 공동묘지로 갔단다. 이 고개가 하도 꼬불꼬불하고 힘들었다고 하여, 아리랑고개로 불렀단다.

부산에도 아리랑고개가 있다. 부산 영도구 봉래동에 소재한 고개이다. 봉래동과 청학동을 잇는 길로서 봉래산 산복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멀리 태종대 및 동삼동 사이를 왕래하던 고개였다. 고개 이름은 당시 유일한 소나무 길이던 이 고개가, 산림이 울창하고 험한데다가 길이 구불구불하여, 울면서 넘어가야만 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단다. 당시 동삼동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꾸러미를 머리에 인 부녀자들이 도둑이 들끓었던 아리랑고개를 넘어 부산장(부산진시장)까지 걸어가서 팔았던 것으로 전한다.

충청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던 아리랑고개도 있다. 충남 논산시~ 전북 완주군을 통하는 길, 논산시 양촌면 신기리로부터 완주군 운주면 안심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재 부근에 697번 지방도가 통과하는데, 아리랑고개 위치는 이보다 동쪽 편에 있다. 신기리의 윗사기소 마을에 더 가깝다.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기에 안심리 금광(金鑛)이 번창하여, 이 고개에 술집을 차렸는데, 이 술집에 들른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민족의 한을 달래기 위해 <아리랑> 노래를 불러서, 아리랑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세월을 더하면서 아리랑도 유행가로 패러디가 많이 되었다.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기에 불려진 본조아리랑·진도아리랑·밀양아리랑을 비롯하여, 영암아리랑(하춘화)·홀로아리랑(서유석)·꿈의 아리랑(조용필) 등이 그러하다. 우리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에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로 등재되었다. 민요 아리랑은 남북한을 통틀어 60여 종, 3천 6백여 수,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밀양아리랑>이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이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과 6.25 전쟁 이후의 대중가요에도 아리랑이 줄을 이었다. <아리랑 낭랑, 아리랑 술집, 아리랑 목동, 꼴망태 아리랑, 서울 아리랑, 나를 두고 아리랑, 님 찾아 아리랑, 아리랑 여로, 아리랑 코리아, 한 많은 아리랑고개, 영동 아리랑, 뗏목 아리랑> 등등.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아리랑 노래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이 모태이다. 그 이전에 불린 것도 많고 많다. 이 노래는 나운규 작사 김서정·단성사 음악대가 곡을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OST 곡이다. 영화의 모티브와 배경지는 나운규의 고향 함경북도 회령에서 청진까지 철도를 부설하던 노동자(일제에 강제 징용된)들이 부르던 애달픈 노랫가락, 우리나라 전래(傳來) 아리랑에서 영감을 받아 착상했단다. 이 노래는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8천만 우리 민족의 통성(通聲)이고, 통곡(痛哭)이고, 통창(統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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