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니스트
장경덕 칼럼니스트

2003년 초겨울 어느 날. LA 북동쪽 패서디나의 한 와인바 앞에 빨간색 페라리가 멈춰섰다. 로이 E. 디즈니는 이 차를 좋아했다. 다른 것으로는 평소 잘난 체하지 않는 그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인 중 한 명임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았다. 로이는 월트 디즈니(1901~1966)의 조카다. 당시 그는 디즈니 왕국에서 창업자의 성을 가진 유일한 경영자였다. 거의 20년 전인 1984년 마이클 아이스너를 디즈니의 CEO 겸 회장으로 불러온 이도 그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아이스너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디즈니의 창조적 에너지가 퇴조하고 있는 터에 아이스너는 자신만이 이 회사를 21세기의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왕국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로이는 그날 저녁 디즈니의 이사이면서 지배구조위원회 의장인 존 브라이슨을 만났다. 브라이슨은 아이스너의 충성파였다. 이사들은 아이스너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은 몇몇은 이미 제거됐다. 아이스너의 경영 성과와 보상 문제에 비판적인 스탠리 골드는 지배구조위원회에서 퇴출당했다. 로이는 얼마 전에도 골드와 함께 아이스너의 성과급 문제를 성토했다. 영업이익이 25%나 줄고 주가는 52주 최저가를 기록하는 마당에 500만 달러나 보너스를 지급하는 게 말이 되는가. 브라이슨은 며칠 전 로이에게 만나자고 했다. 남들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을 고집했다. 아이스너의 뜻에 따라 골드를 제거하려는 게 아닐까. 그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지?

브라이슨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로이, 당신은 규정상 은퇴연령을 지났지요.”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로이는 깜짝 놀랐다. 이사의 은퇴연령은 72세였다. 로이는 그해 73세가 됐다. 그러나 그 규정은 다른 부문의 수장인 경영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로이는 애니메이션 부문 회장이었다. “우리는 당신이 다시 이사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로이는 믿을 수 없었다. 이사회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는 할 말을 잃고 브라이슨을 쳐다보았다. 칼날에 심장을 찔린 느낌이었다. 그는 여전히 디즈니의 주식을 가장 많이 가진 주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반세기의 삶을 디즈니에 바쳤다. 이사회에서 창업자 월트 디즈니와 직접 연결되는 이는 그밖에 없었다. 아버지 로이 O. 디즈니(1893~1971)는 월트와 함께 이 왕국을 일으켰다. 어렸을 때는 월트가 동화를 들려주고 ‘피노키오’를 읽어주었는데···.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이스너의 이사회는 틀림없이 로이가 조용히 물러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성이나 값비싼 요트에서 여생을 즐기려니 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갑자기 투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당신들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소.” 그는 브라이슨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이렇게 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요.”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탐사 기자 제임스 B. 스튜어트가 쓴 ‘디즈니 전쟁(Disney War)’의 한 대목이다. 책은 디즈니 왕국에서 벌어진 권력 암투를 생생하게 그려준다. 아이스너는 창업자의 핏줄 가운데 유일하게 경영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던 사람을 이사회에서 축출했다. 로이 디즈니는 가만있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치열하게 싸운 끝에 결국 아이스너를 회장과 CEO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21년 동안 디즈니의 왕좌를 차지했던 아이스너는 2005년 로버트 아이거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다. 아이거는 아이스너를 제2의 창업자로 여겼다. 그는 15년 동안 왕좌를 지켰다. 그 자리를 물려받은 밥 차펙은 실적 부진으로 3년이 채 안 돼 경영권을 내놓아야 했다. 지난해 11월 이사회는 71세의 아이거를 다시 불러왔다. 그는 2년 안에 경영을 재정비하면서 마땅한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

월트와 로이 디즈니 형제는 1923년에 이 회사를 설립했다. 올해 10월이면 꼭 100년이 된다. 두 번째 세기를 맞는 디즈니 왕국이 안팎으로 맞닥뜨린 도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경영권 승계 문제다. 디즈니는 지난 40년 동안 승계 문제로 골치를 썩였다. 아이스너의 장기 집권 후에 낙점을 받은 아이거도 네 차례나 은퇴를 연기했다. 잠재적인 후계자들을 올려주었다가 퇴짜를 놓곤 한 것이다. 아이거는 회고록 ‘디즈니만이 하는 것(The Ride of a Lifetime)’에서 “누구나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길 원한다”며 “훌륭한 리더십은 대체 불가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리더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준비를 하도록 아랫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있다”고 했다.

또 하나의 도전은 미디어 환경과 기술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디즈니의 주식시가총액은 2년 전 3600억 달러로 정점에 이른 후 반 토막이 났다. 갈수록 격화하는 스트리밍 대전은 말 그대로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다. 누구보다 창조적이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신기술을 끌어안았던 월트 디즈니가 지금의 경영자들을 보면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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