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1958년 어느 봄날, 서울 중앙여고를 갓 졸업한 김혜자라는 낭자(아가씨)가 명동거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여학교를 다니면서 스튜어디스의 꿈을 품고 지냈지만, 막상 취업의 문을 들어서기는 녹록지 않던 시절이다. 그 시절은 6.25전쟁이 종전(終戰)이 아닌 휴전(休戰)으로 정지된 지 5년, 미8군사령부가 동경에서 서울로 이전해 온 지 3년여가 되던 때이다.

우리나라 GNP는 100달러 아래위를 숨 가쁘게 오르락거리던 때인데, 이때 우리나라에 펼쳐진 대중음악 시장이 미8군무대이다. 그렇게 스산하던 시절 명동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귀인(오빠 친구)의 주선으로 가수의 길로 들어선 그 처녀는, 2008년에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을 펼쳤다. 그때 발표한 신곡 이름이 <그대 내 친구여>이다. 노래의 주인공은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 살아 있는 전설의 디바 패티김, 그녀의 50주년 기념음반에 실린 이 노래를, 2023년 미스터트롯2에서 안성훈이 불러서 1등(진)으로 등극하였다.

어둠 속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 / 나의 손을 꼭 잡아 준 사람 / 비바람 불어도 / 늘 곁에 있어 준 사람 / 그건 바로 당신이었소 / 내 삶이 때론 노래가 되고 / 때론 서글픈 사랑이 돼요 / 황금빛 노을 / 붉은 파도 위를 달리는 / 바람이 되고 싶소 / 내 친구여 내 사랑아 / 나 죽어도 그대 잊지 않으리 / 평생을 사랑해도 / 아직도 그리운 사람 / 그대는 내 친구여.

노랫말도 불그레한 석류즙을 흠뻑 머금은 하얀 수건처럼 눅눅하고, 멜로디는 고희의 인생을 위로하는 성가(聖歌)처럼 묵직하다. 나 죽어도 그대 잊지 않으리~. 패티김이 세상을 향하여 이 절창을 포효할 당시 나이는 70세였다. 가수 인생은 50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는 고희(古稀)에, 하늘의 뜻을 알아차리는 노래 삶의 고개 지천명(知天命)에서 대중가요 유행가로 친구(親舊)를 되새김한 것이다. 이 노래가 묵시하는 친구는 평생의 연인이고, 반려이고, 벗이고, 동반이리라.

트로트의 부흥, 대중가요의 대중화, 유행가의 유행화라는 시대적 감흥 불길(경연)에 휘발유를 뿌리는 듯한 안성훈의 절창은 경연장을 눈물의 장으로 만들었다. 무대 뒤 모니터 스크린은 검은빛 바다 물결, 방청석은 어두운 서포터 조명 아래 은빛 촛불을 든 감동 물결, 아들 이름(안성훈) 피킷을 가슴팍에 감싸든 주먹밥 집 주인공 어머니 아버지는 일그러진 회한의 눈물, 심사위원인가 관람객인가를 분간 못 할 만큼 가수의 노래에 공감한 마스터들의 술렁거리는 물결~.

내 삶이 때론 노래가 되고 / 때론 서글픈 사랑이 돼요 / 황금빛 노을 / 붉은 파도 위를 달리는 / 바람이 되고 싶소 / 내 친구여 내 사랑아 / 나 죽어도 그대 잊지 않으리 / 평생을 사랑해도 / 아직도 그리운 사람 / 그대는 내 친구여 / 내 친구여 내 사랑아 / 나 죽어도 그대 잊지 않으리 / 평생을 사랑해도 / 아직도 그리운 사람 / 그대는 내 친구여.

평생을 사랑해도 아직도 그리운 사람~ 내 친구여. 이런 사람 어디 계시는가? <그대 내 친구여> 노래 속 패티김의 친구는, 그녀의 영원한 연인 길옥윤(1966년 결혼, 1973년 이혼)과 아바라도 게디니(1976년 결혼)가 아닐까. 그녀를 마음속의 반려로 생각하면서 80년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간 박춘석일지도 모를 일이다. 안성훈의 영원한 친구는 누구일까. 같은 소속사인 영기일까, 김호중일까, 무명 시절 함께 했던 송가인일까. 이들은 죽마고우는 아니고, 평생을 같이 갈 동반가구(同伴歌舊)임이 분명하다.

김혜자 패티김은 1958년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가수 이해연의 남편 베니김 추천으로 린다김이란 예명으로 미8군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미국 가수 패티 패이지의 이름을 본따, 패티김으로 예명을 바꾼다. 그녀는 1962년 우리나라 최초로 리사이틀 공연을 하였고, 1971년 디너쇼도 시도한다. 이후 일본·동남아·미국 등 서구로 진출하며, 미국 카네기홀과 호주 오페라하우스 공연을 하는 등 원조 한류이다.

1978년에는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패티김 리사이틀, 서울의 연가’를 공연했으며, 1989년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였다. 그녀는 2012년 생년 74세, 가수 생활 54년을 결산하는 <이별>(원곡 제목,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을 전국 16개 지역 순회공연 후 2013년 가수 생활을 마감했다. 하지만 85세인 지금도 가끔은 카메라 앞에 오롯한 모습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1958년 봄날, 명동거리를 누비다가 김혜자가 귀인을 만난 사연은 이렇다. ‘너, 혜자 아니냐?’작은 오빠 친구 곽준용이었다. 준용은 기타를 들고 집으로 찾아와 혜자의 형제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어머 준용 오빠, 저 직장 구하러 다니는 중이예요.’ 준용은 혜자의 대답에 놀란 듯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더니, ‘너 노래 한번 해보지 않을래? 노래 잘하잖아.’ 한국대중가요사에 새로운 이정표(여성가수 디바)를 세우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곽준용은 김혜자를 화양흥업 전무 베니김 집으로 데려갔다. 당시 곽준용은 화양흥업 소속 기타리스트였다. 화양흥업은 국내 최초의 기획사로 미8군 무대에 가수·연주자·무용수·사회자 등을 공급하고 있었으며, 베니김은 기획자였다. 서울대 치대 출신 베니김은 피아노와 트럼펫 연주자로서 직접 가수를 선발했다. 당시 베니김은 미8군 무대에서도 인기 정상을 누리고 있었다. 1956년 흑백 TV 방송이 시작(12월 1일)되기 전, 국내에서 연예인이 설 자리는 미8군무대가 유일했다. 약속한 두 사람이 들어서자 베니김은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김혜자라고 했지? 그래 무슨 노래를 부를 줄 아니?’ 표정은 엄숙하고 진지했으나 말투는 부드러웠다. 김혜자는 <You don`t know me>와 <Memories are made of this> 두 곡을 잇달아 불렀다. ‘굉장히 소질이 있군.’ 베니김의 혼잣말이, 잔뜩 긴장한 채 노래를 부른 김혜자의 떨리는 가슴을 얼마간 진정시켜주었다. ‘가수가 되고 싶니? 예!’ 김혜자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내일부터 우리 집에 와서 레슨을 받아라.’

그렇게 눈코 뜰 새 없는 사이 한 달이 지났다.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김혜자에게 베니김이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네 월급이야. 한 달이 지났잖아.’ 레슨비를 걱정하고 있던 김혜자에게 오히려 월급을 주었다. 연습 과정도 일로 치는 서양식 합리성이었다. 집에 와 펼쳐보니 3만 환이 들어 있었다. 당시 서울의 대학교 1년 등록금이 6만 환쯤 하던 시절이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 우리나라 노래방(1991년 도입) 역사상 2010년으로부터 10여 년간 줄곧 1위 곡으로 불리는, <안동역에서>(김병걸 작사 최강산 작곡)를 진성이 2008년 처음으로 녹음을 할 당시 김병걸은 진성에게 50만 원을 건네며 부르게 했다는 말이 바람결에 흘러 다닌다. 김혜자(패티김)를 전설적인 디바가 될 것으로 예측한, 베니김의 눈과 <안동역에서>가 불멸의 국민애창곡이 될 것을 예감한 김병걸의 예지력은 신의 한 수였다.

그렇게 연습생으로 정확하게 3개월이 지나자 베니김은 김혜자를 미8군무대에 세웠다. 아내 이해연과 듀엣으로 패티 페이지의 팝송 두 곡을 부르게 한 것이다. 그만큼 김혜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고, 베니김의 조련에 빨리 적응했다. 김혜자는 이해연과 똑같이, 까만색 미니스커트에 역시 까만색 민소매 재킷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객석에서 난리가 났다. 20대의 혈기 발랄한 미군들, 사석에서는 자유분방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키 168㎝에 콜라병 몸매인 20세 김혜자, 그녀의 인기는 무대에 서는 첫 순간 이미 하늘을 찔렀다. 이렇게 가수의 길로 들어선 패티김의 첫 남편 길옥윤은 국민 형님 송해(1927년 황해도 재령 출생)와 동갑내기였다.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서 친구 노래는 많다. 1971년 정무영은 고향 친구를 <친구야 잘 있느냐>로, 1972년 서유석은 배신당한 친구를 <친구야>로, 1977년 박상규는 어린 날 개구쟁이 동무를 <친구야 친구>로, 1983년 조용필은 하늘나라로 먼저 간 친구를 <친구여>로, 2015년 진시몬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생각 나는 친구를 <보약 같은 친구>로 열창했다.

패티김의 <그대 내 친구여>를 열창한 안성훈은 1989년 시흥 출생, <울고 넘는 박달재> 가수 박재홍과 동향이다. 용인 남사중학교, 오산 운천고등학교, 세명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육군 제7보병사단에서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친 역전의 용사, 군악대 출신이다. 그는 2012년 <오래오래>로 데뷔한 후 2023년, 프로와 아마추어의 무한 경쟁 무대인 미스터트롯2에서 1등을 하였다. 안성훈에게 갈채를 보낸다. 이제 안성훈이 트로트를 지향하는 수많은 무명의 신인가수들에게 희망의 푯대가 되어주기를 당부드린다. 그대 내 친구여~. 지음(知音)이 그리운 실록의 5월이 가고 있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