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니스트
장경덕 칼럼니스트

로스차일드(로트실트)는 붉은 문패라는 뜻이다. 프랑크푸르트의 비좁고 누추한 유대인 거리에 살던 마이어 암셸(1744~1812)은 귀족들에게 희귀 동전을 팔며 자본을 모았다. 로스차일드가 이 집안의 성으로 굳어진 것은 이즈음으로 보인다. 그의 다섯 아들은 프랑크푸르트(장남 암셸)와 빈(차남 잘로몬), 런던(삼남 네이선), 나폴리(사남 카를), 파리(막내 제임스)에 자리를 잡고 오늘날의 다국적 기업과 같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로스차일드는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 동안 세계 최대 은행이었다.

다섯 형제의 사령관이었던 네이선(1777~1836)이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재산 350만 파운드는 당시 영국 국내총생산의 0.62%에 달했다. 2022년 영국 GDP는 3조1000억 달러였다. 그 0.62%는 192억 달러다. 오늘날 세계 최고 부호인 베르나르 아르노나 일론 머스크의 재산이 2000억 달러를 넘나드는 것과 비교하면 그리 놀라운 숫자는 아닐 수도 있다. 21세기의 기업가는 19세기의 자본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시장에서 빠르게 부를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네이선보다 많은 재산을 남긴 부호는 아무도 없었다.

로스차일드 가가 지옥 같은 유대인 거리에서 뛰쳐나와 단숨에 그토록 많은 부를 거머쥔 데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지난 칼럼에서 봤듯이 워털루 신화는 대부분 허구로 밝혀졌다. 로스차일드 가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출처가 의심스러운 금언들도 많다. 예컨대 재산의 3분의 1은 증권, 3분의 1은 부동산, 3분의 1은 보석과 미술품으로 보유하라거나, 주식시장을 찬물 샤워를 할 때처럼 재빨리 들어갔다가 재빨리 나와야 한다거나, 모든 걸 독식하지 말고 마지막 10%는 다른 이들에게 남겨두라는 것이 그렇다.

로스차일드 가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같은 정치적 격변기에 무섭게 성장했다.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고 위험을 무릅쓴 덕분이었다. 1793년부터 1815년까지 유럽에서는 전쟁이 거듭됐다. 나폴레옹은 “군대는 배가 불러야 전진한다”고 했다. 스페인 군대를 프랑스로 데리고 가려던 웰링턴은 “급여와 식량이 없으면 그들은 약탈할 수밖에 없고 그런다면 우리 모두 파멸할 것”이라고 했다. 네이선은 이 지점에서 기회를 잡았다.

영국은 가장 효율적인 금융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중앙집중식 조세 체계와 투명한 재정 운용, 안정적인 통화제도 덕분에 18세기에 여섯 차례나 전쟁을 치르면서도 큰 정치적 위기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1793년 2억4000만 파운드였던 국가채무는 1815년 국민소득의 두 배인 9억 파운드까지 늘었다. 금괴 밀수와 직물 수출을 하던 유대인 머천트 뱅커 네이선은 유럽의 운명을 가를 전쟁터로 돈을 보내야 하는 영국 정부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로스차일드 가는 금을 인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2%의 커미션을 받았다. 동맹국들에 영국 정부의 보조금을 전달할 때도 커미션과 환차익을 벌었다. 자본시장과 국제 결제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당시 각국 정부의 절박한 수요를 충족시킨 다국적 금융 네트워크는 빛을 발했다. 나폴레옹이 패한 후에도 전후의 부채와 배상금을 청산하는 사업이 짭짤했다. 유럽의 자본가들은 새롭게 떠오르는 국제 채권시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럴수록 전통적인 토지 자본가보다 금융 자본가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시장에서 성패를 가르는 것은 정치적 신뢰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채권을 발행한 나라가 전쟁이나 국내 정세 불안으로 채무 불이행 사태를 맞을 조짐이 있는지 누구보다 주의 깊게 살폈다. 늘 정치 활동의 핵심부 가까이에 있으면서 각국의 뉴스를 재빨리 입수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 돈을 투자했다. 총리와 재무장관들, 왕실과 귀족들이 엮인 인맥은 곧 막강한 정보력이자 정치적 영향력이었다. 역사학자 퍼거슨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경제사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진정한 의미의 국제 채권시장을 창출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나폴레옹 전쟁 후 한 세기가 지났을 때 또 다른 전쟁이 유럽을 휩쓸었다. 19세기 초의 전쟁에서 거대한 부를 축적했던 로스차일드 왕국은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에서는 그 부를 잃었다. 한 세기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로스차일드 가는 금본위의 통화 체제를 바탕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참전국들이 금 태환을 중지하고 환율을 통제하자 사업은 혼란에 빠졌다. 서유럽 전역에서 철도 건설에 참여했던 이 가문은 기관차마다 전장으로 군인들을 실어나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또 조세 체계가 바뀌자 전에 없던 고율의 상속세를 내야 했다.

19세기 초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프로이센에 차관과 보조금을 제공해 나폴레옹을 무릎 꿇렸다. 20세기 초 전쟁에서 영국 정부는 미국의 신용에 의존했다. 한 세기 전 전시 재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로스차일드는 이제 미국의 JP모건에 그 역할을 넘겨주었다. 대서양 건너편에 로스차일드 은행을 세우지 않은 것은 전략적 실패였다. 19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이 금융 왕국은 더 넓고 깊은 인재와 자본의 풀을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전설적인 금융 가문은 왜 더 큰 제국을 건설하지 않고 쇠락의 길을 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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