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니스트
장경덕 칼럼니스트

1836년 6월 런던의 네이선은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그달 15일 아들 라이오넬과 조카(동생 카를의 딸) 샬로테가 결혼했다. 59세의 네이선은 정력이 넘쳤다. 문제라면 등 아래쪽에 생긴 종기뿐이었다. 처음에는 참고 일을 했다. 통증이 심해지자 런던에서 불려온 명의도, 현지의 외과의도 퍼져나가는 독을 막지 못했다. 아마도 포도상구균이나 연쇄상구균 패혈증이었을 것이다. 네이선은 결국 다음 달 28일 숨을 거뒀다. 8월 3일 더타임스지는 켄트 지방에서 잡힌 비둘기를 통해 네이선의 죽음이 처음으로 영국에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비둘기 다리에 묶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는 죽었다.’

네이선은 이런 유언을 했다. “내 사랑하는 아내 한나는 사랑하는 네 아들과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언제나 협력하고 모든 협의에서 목소리를 낼 것이다. 또 아들들은 미리 어머니의 조언을 요청하지 않고는 어떤 거래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특별한 바람이다.” 그는 네 아들과 네 형제가 변함없는 파트너십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랍다. 하나는 당대 세계 최고 부호가 한낱 종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다. 요즘 같으면 그런 종기쯤은 항생제 하나로 간단히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균 이론이 나오지 않은 당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유럽의 운명이 걸린 전쟁을 판가름할 수도 있었던 막강한 부도 세균과 싸움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또 하나는 그의 아들이 사촌과 근친 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근친 결혼은 특히 잦았다. 네이선의 딸 샬럿은 형 잘로몬의 아들 안젤름과 짝이 됐다. 네이선의 5형제(암셸, 잘로몬, 네이선, 카를, 제임스) 중 막내는 둘째 형의 딸 베티와 결혼했다. 1824년부터 1877년까지 이 집안의 혼사 21차례 중 무려 15차례가 마이어 암셸의 직계 자손끼리 한 결혼이었다. 이는 가업의 파트너십을 단단히 하고 자본이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배타적인 공동체인 로스차일드는 하나의 왕가였다. 그들의 편지에는 ‘우리 로열 패밀리’라는 표현도 나온다. 로스차일드 사람들은 대리인들이 배신하지 않는지 늘 의심했다. 대리인들의 오만과 독립심, 무능력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했다.

창업자 마이어 암셸은 아들들을 대대로 결속시키고 딸과 사위를 철저히 배제하는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이 구조는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켜졌다. 1812년 세상을 떠난 그는 이렇게 유언했다. ‘내 딸과 사위, 그 상속인들은 회사 지분을 소유하지 못하며 아들들의 평화로운 소유에 불화를 일으키는 자녀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는 무엇보다 단합을 강조했다. 훗날 맏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단합은 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으로 가장 중요하고 성스러운 의무로 받들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로스차일드가 문장에는 화살 다섯 개가 한 묶음으로 그려져 있다. 다섯 형제가 뭉치면 꺾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물론 형제들끼리, 그리고 숙부와 조카들이 격하게 충돌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화합(concordia)과 정직(integritas), 근면(industria)을 내세우는 가문의 신조를 지키려고 애썼다.

마이어 암셸은 “운이 좋은 정부보다 어려움을 겪는 정부와 거래하는 것이 낫다”고 가르쳤다. 혁명과 전쟁 통에 수지맞는 거래는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정부가 아니라 가장 절박한 정부를 상대로 한 것들이었다. 그는 또 “사람들이 너희를 사랑하게 하지 못하거든 두려워하게 하라”고 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유대인과 금전적인 파트너십을 맺으면 그는 유대인 사람이 된다(belongs to the Jew)”고도 했다. 다섯 형제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힘 있는 정치인들에게 선물을 건네고 돈을 빌려주고 투자 정보를 흘려주고 뇌물을 안겼다.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는 “돈은 우리 시대의 신이며 로스차일드는 그 선지자”라고 했다. 이 금융 왕국은 1825년 금 태환 정지 위기를 맞은 잉글랜드은행에 최종 대부자의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1868년 마이어 암셸의 다섯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제임스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가문의 구심력은 약해졌다. 제임스는 선친이 그랬듯이 “고난의 시절에 피난처가 돼줄 형제간의 신뢰와 단합을 절대 잊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또 온갖 사업에 가문의 이름을 남발하지 말고 가문의 명망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산 일부는 가능한 한 빨리 현금화할 수 있는 증권으로 보유하라는 당부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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