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세상살이는 기다림의 연속과정, 장밋빛 미래를 기다리는 마음은 남녀노소가 다 같다. 하지만 백마를 탄 기사를 기다리는 두근거리는 분홍빛 여심과 숲속의 요정을 닮은 신데렐라를 고대하는 남정네의 푸른빛 설렘은 온도와 빛깔이 다르다. 이 두근거림과 설렘의 차이를 얽어 아낙네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최진희의 목청을 넘어 세상에 왔다. 1986년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유행가 명품, <카페에서>이다. 같은 음반에 <아름다운 이별>(꼬마 인형)도 얽었다.

나 혼자 이렇게 앉아있어도 / 그 사람 오지 않네 / 이곳에 와서 만난 그 사람 / 지금은 왜 못 오시나 / 희미한 불빛 카페에서 / 남은 술잔에 던져버린 나의 모습 / 바라보는 너기에 잊을 수 없어 / 아~ 그 추억 아~ 그 순간 / 사랑의 미련이어라

이 노래의 주인공 화자는 희미한 불빛 카페에서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면서 자작(自酌), 혼술(혼자 마시는 술)에 취해가고 있다. 술잔은 반쯤 비어 있고, 불그레한 얼굴이 술잔 속에 빠져있다. 남은 술잔에 연인의 발길을 묶어 놓고 떠나간 님은 다시 돌아왔을까. 우리나라에 카페라는 말이 들어 온 시기는 1980년대 후반이다. 이 노래는 다방에서 카페로 천이되던 차(茶) 문화를 품은 유행가다.

카페에 홀로 앉은 연인, 그의 가슴팍에 아름다운 추억이 쓰라린 기억으로 아롱지는 순간이다. 추억은 마른 솔잎을 태울 때, 허파 속으로 스미는 솔깃한 향기처럼 맛 나는 옛 생각이다. 기억은 아름다운 장미꽃 떨기를 만지작거리다가 대궁에 붙어 있는 가시에 찔린 듯한, 아픈 옛 생각이다. 이처럼 기다리는 연인이 눈앞에 나타나면 살뜰한 추억의 벽돌 한 장이 더 놓이고, 아니 오면 서글픈 기억의 주름살이 한 줄 더 겹쌓인다. 하지만 <카페에서> 노래 주인공은, ‘아~ 오늘도 내일도 사랑은 추억이어라’하고 흥얼거린다. 사랑의 온도계가 내려가지 않았음이다. 분홍빛 가슴팍이 두근거리고 있음이다. 그녀의 마음 방은 늘 우두커니 혼자 앉아서 기다리는 카페이다.

카페의 어머니 같은 장소는 다방(茶房)이다. 이 다방을 중심으로 한 다도 문화를 무르익힌 나라는 동방 3국(중국·조선·일본)이고, 번성 시기는 8∼9세기 무렵이란다. 그중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에 다연원(茶淵院)이 있었으며, 고려시대는 다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때 다방은 차와 술·과일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국가기관이었으며, 상업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조선시대는 이조(吏曹, 중앙인사행정기관)에 속하여, 차례(茶禮)라는 명목으로 외국 사신들의 접대를 맡았다. 특히 고려시대는 팔관재(추수감사절 같은 나라행사)나 공덕재(복을 비는 행사) 등 불교 의식에 사용하였고, 사찰에서 차촌(茶村)을 일구었단다. 차 농사다. 조선시대에는 접대용으로 차보다 술을 많이 사용한 까닭에 다방 대신 술집이 발달하였고, 이것이 주막·주점·방석집·요정·룸살롱으로 이어진다.

구한말(1897~1910) 대한제국기에 개화 물결을 타고 커피와 홍차 등이 보급되면서 다도 문화에 변화가 나타났다. 그 시절 왜래 문화가 한국화된 용어로도 탄생한다. 커피는 가배차·가비차(加比茶) 또는 양탕(洋湯)이라고 불렸다. 이와 더불어 근대 형태의 다방이 등장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은 1888년 최초의 근대식 호텔 대불호텔(인천) 안에 자리한 다방이다. 이곳의 주 고객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1883년 개항한 인천항(1876년 부산항, 1880년 원산항)을 통하여 들어오는 외국인들이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인 이태가 운용한 스튜어드 호텔 안의 부속다방도 있었단다. 이곳에서 오늘날의 커피를 상품으로 취급하였다. 1902년 정동 29번지에 설립한 손탁호텔도 이러한 서양문화 천이에 기여한 곳이다. 손탁(女. 1854~1925)은 프랑스와 독일 접경지역 출신으로 1885년 조선에 부임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1841~1901)의 처남 처형이었단다. 이곳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커피를 처음으로 판매하였단다.

오늘날 카페와 유사한 다방을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개업한 것은 1927년 봄, 영화감독 이경손(1905~1977. 개성 출생, 태국 사망)이 하와이에서 데려온 묘령(妙齡)의 여인과 종로구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였다. 카카듀라는 이름은, 프랑스 혁명 당시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사람들이 만나던 비밀 아지트 술집 이름이다. 이경손은 우리나라 최초 영화감독으로 <춘희>·<장한몽> 등 영화를 제작하였고, 그가 직접 차를 끓이는 서비스를 하여 더욱 유명하였다. 그러나 경영도 미숙하고 손님도 많지 않아서 이경손은 몇 개월 만에 카카듀의 문을 닫고 중국 상해로 갔단다. 영업성과 부진이 이유인데, 구들장 문화에 들여온 탁자 문화 정착기의 난상(亂像)이었으리라.

인류역사상 최초의 커피집은 1530년경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개장되었으며, 뒤이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커피집들이 생겨났단다. 우리나라는 구한말 대한제국기·식민기·해방정국기·6.25전쟁기를 거치면선 서양 문물 유입과 함께 커피(차) 공간이 생성된다. 이 공간이 1960~1970년대는 시화전·전시회·연극 공연을 하는 문화·사교의 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이러한 공간의 대표 격이 혜화동 대학로 학림다방이다.

그 후 1970년대에는 다방에 DJ까지 등장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우리 대중가요 100년사에 DJ, 디스크자키(disk jockey)라는 직업이 화려한 조명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 출발점이 이 시기다. LP·SP 음반을 축음기 턴테이블에 올려 주면서, 노래 신청 사연을 낭송해 주던 사람이다. 신청인의 주관적인 경험이 모티브가 된 사연은 대중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흥으로 공명하여, 신청 곡이 흐르는 실내를 눈물바다로 만든 예는 많고 많다. 음악다방, 카페의 물줄기다. 이후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대중적인 커피 전문점이 등장한다. 어두침침한 분위기의 다방에서 좀 더 밝고 오픈된 공간으로 인테리어도 다양하게 바뀐다. 그 커피 문화의 꼬랑지에 매달린 <카페에서> 노래 2절에 그 시절 다방 풍광이 대롱거린다.

못 잊어 이렇게 찾아 헤매도 / 그 사람 소식 몰라 / 나 항상 너를 생각하지만 / 네 모습 보이지 않네 / 희미한 불빛 카페에서 / 남은 술잔에 나의 발길 묶어 놓고 / 떠나버린 너지만 지울 수 없어 / 아~ 오늘도 아~ 내일도 / 사랑은 추억이어라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서 이런 카페를 얽은 노래는 1930년 이애리수의 <카페의 노래>, 1934년 최명주의 <카페의 밤>, 1983년 유심초의 <카페에서>, 1985년 이태원의 <카페와 여인>, 1986년 강승모의 <카페부르스>·이경화의 <카페의 연인들>·전원석의 <슬픈 카페의 노래>, 1987년 김범룡의 <카페와 여인>·이순길의 <카페의 연인들>·김흥국의 <어느 날 카페에서>·남진의 <찾아온 카페>, 1988년 이정석의 <카페 이야기>, 1989년 이춘근의 <고독한 카페>·박성미의 <카페의 추억>·정수라의 <카페에서 만나줘요>, 1990년 신효범의 <비 그리고 카페>·김완선의 <작은 카페 이야기>, 1991년 신해철의 <째즈카페>·송홍섭의 <바다가 보이는 카페>, 1992년 윤시내의 <카페 문이 열리면> 등으로 이어진다. 대중가요 유행가는 탄생 시점의 유행을 얽은 보물이다. 유물이다. 유행가를 해부하면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역사의 실타래가 솔솔 풀려나온다.

<카페에서> 노래를 멜로딩한 김영광은 1942년 포항에서 출생하여 현역 작곡가로 활동 중인 베테랑이다. 기타·피아노·작사·작곡은 그의 일상, 히트곡 메이커다. 그는 포항고 2학년 여름 방학 때이던 1959년 미8군 무대에서 록음악밴드 키보이스(Key Boys)의 <정든 배>를 작사·작곡하여 데뷔했다. 1960년 신세기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발탁되었고, 1961년 포항고 졸업 후 서라벌예술대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1964년 기타연주자 겸 작곡가 김희갑이 음반 프로듀서를 맡은 키보이스의 음반 디렉터를 맡은 것이 음반 제작자로서의 시작이었다. 그 후 남진·나훈아·조용필·김국환·최진희·주현미·태진아 등의 히트곡을 양산했다. 작사가 김중순·지명길·이호섭·이건우·박건호·김동주·김순곤 등과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이 대다수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제18대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을 지냈다.

최진희(본명, 최명숙)는 1957년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 영생고를 졸업하고, 1983년 <그대는 나의 인생>으로 데뷔하였다. 그녀는 가수 꿈을 안고 친구와 같이 서울로 와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며 양떼들·조커스 등으로 활동한다. 이때 출연한 곳이 호텔 삼정·도쿄 등이며, 1982년 호텔 엠버서나이트클럽에서 활동할 때, 에이원쇼 악단장인 김희갑(양인자 남편)의 눈에 띈다. 당시 김희갑은 KBS 드라마 <청춘 행진곡>을 맡았고, 이 주제가 <그대는 나의 인생>을 최진희가 불러서 스타가 된다. 이 곡은 노래가 음반보다 세상에 먼저 나온 곡. 베이스 연주자였던 허영래와 한울타리라는 이름으로 녹음하여, 1984년 라디오방송 횟수 1위를 기록했다. 최진희 고모가 최선자(1941~. 전주 출생), 무당(巫堂) 연기파 배우다. 최진희는 노래와 악기연주 등을 프로 수준으로 잘하는 아버지로부터 예술 DNA를 물려받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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