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가요황제 조용필의 역사 유행가 <간양록> 제목은 원래 책 제목이다. 임진왜란 후반,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7년 9월 전라도 남쪽 바다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600년 5월 탈출하여 귀국해온 형조좌랑 수은 강항(1567~1618)이 쓴 책 이름. 필사본과 목판본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80년 이러한 사연을 역사드라마 작가 신봉승(1933~2016, 명주 출생)이 노랫말을 짓고, 가왕 조용필이 곡을 엮어 스스로 불렀다. 임진왜란(1592~1598)의 한을 절규한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 한 단면을 서사한 애창(哀唱), 이 노래는 당시 MBC의 인기 드라마 <간양록>의 주제곡이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  달일세 /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 어야 어야 어야~ 어야 어야 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 어야어야어야아 어야어야어

노랫말에 적국(倭)의 볼모로 잡혀 있는 포로의 한숨과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 상황에서도 고향 뒷산 선영의 벌초를 생각하고 있다. 여기 고향 뒷산은 전남 영광의 산자락이다. 수은 선생은 아마도 한식(寒食) 즈음에 이 소절을 고뇌했던 듯하다. 한식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 되는 날이다. 양력으로 4월 5~6일쯤인데, 380여 년의 역사를 반추(反芻)한 억장(億丈) 무너질 만큼의 분노가 발활(勃活) 하는 역사 유행가의 한 대목이다.

강항 선생은 왜국에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왜군 막부(幕府)의 귀화 요청을 끝내 거부하고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억류 생활을 하던 지역의 후시미 성주에게 자신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편지를 여러 번 썼고, 억류 2년 8개월 만에 귀국한다. 그는 억류 기간 중 여러 차례의 비밀 편지를 선조 임금(1552~1608)에게 보낸다. 적국(敵國)의 정황을 적은 정보 편지였다. 2절(후렴) 노랫말에도 피눈물이 그렁거린다.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 님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 세라 //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아 어야어야어.

노래의 가사와 가락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포로로 끌려갔던 조상들의 역사와 오버렙 해 보면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이 노랫말은 『간양록』에 나오는 구절의 변형인데, 원래 시는 왜국으로 피납(被拉)되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한 이엽(李曄, 경상수영 우후)의 시가 모체란다. ‘어버이는 밤 지팡이 잃고/ 새벽달 울부짖으며/... 지켜오던 조상 묘지에는 풀 반드시 거칠었으리.’

그 시절(1592~1598) 왜국으로 피납된 우리들의 형님과 누이들은 과연 몇십만일까. 피멍 든 우리 역사책의 갈피에도 분명하지 않고, 때 묻은 흔적까지 왜곡한 일본의 기록을 신뢰하기는 더욱 꺼림직한 것은 왜일까. 그로부터 330여 년 뒤의 식민지 시절과 태평양전쟁에 강제 징용된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그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폐칩(廢蟄)된 속박상태와도 겹쳐진다.

<간양록> 노래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한 임진왜란(1592.4~1596)과, 조선 하4도(경기·충청·경상·전라) 할양(轄㔀)을 전략적 목표로 지향한 정유재란(1597~1598) 중의 왜군들 폭거를 묵시하고 있다. 이 소절과 소절 사이의 행간에 아롱진 아픔과 분노는, 그 속을 살아 낸 우리 어버이의 어버이들의 피폐한 삶이, 생채기 나고 피멍이 든 채로 고스란히 품고 있다.

책 이름 『간양록』은 당시 왜국 억류 생활을 기록한 포로 수기, 원래 명칭은 건거록(巾車錄)이었다. 건거는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뜻인데, 왜구의 포로였던 강항이 포로였던 자신을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고 지은 것이다. 이것을 강항의 수제자 윤순거(1596~1668)가 간양(看羊)이라 고쳐 불렀다.

간양은 중국 한 무제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흉노 왕 선우(單于)의 회유를 거부하고, 양을 치는 목동 노역을 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蘇武, ?~BC60)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다. 소무는 전한(前漢) 시대 한나라의 중랑장(中郎將)이었다.

간양록 내용은 난중옥필(亂中玉筆)이다. 붓으로 지은 칼이고 방패였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비길만한 내용 4가지이다. 첫째, 적국이던 왜국(일본)에서 선조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는 일본의 지리·지세·관호·군제·형세 등을 기록한 것. 둘째는 적국이었던 일본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를 적었다.

셋째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있던 조선인 포로들에게 준 고부인격(告俘人檄), 이는 조선으로 귀환이 결정된 뒤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국에 남아 있던 조선 포로들에게 보낸 격문이다. 이 글은 왜국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며, 왜국에 남아 있는 포로들에 대한 격려와 분발을 촉구한다.

넷째는 포로 생활 중 조선으로 귀환하여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와 왜국에서의 환란생활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이다. 이러한 포로 생활의 서사가 드라마 주제곡이면서 대중가요로 환생한 것이 『간양록』이다.

강항은 정유재란(1597~1598)때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이광정의 종사관(보좌관)으로 남원에서 군량 보급을 담당하다가 그곳이 함락된 뒤 고향 영광에서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이때 인근 지역이 왜군에게 침략당하자 가족을 데리고, 고향 영광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영 설치를 의도하면서 해상기동을 하고 있던 목포 인근으로 향하던 중,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1597.9.16. 양력 10.26)으로 전술적인 대 승리를 거둔 후, 고군산반도(60여 개의 섬, 산이 바다에 떠 있는 군산 앞바다)까지 회피 항행을 하면서 추적하는 왜군 수군을 따돌렸었다. 당시 강항의 나이는 30세였다.

강항이 포로로 끌려갔던 1597년 9월은 원균이 칠천량해전(1597.7.15. 양력 8월 27일)에서 대패한 두 달 후다. 또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1597.8.3.)된 2개월여 뒤다. 당시 득의만만하던 왜군들은 그해 9월 16일(음력) 진도 앞바다 명량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13:133의 대패를 당한다. 호남 곡창지대와 서해안 우회기동 전략을 수행하던 왜적들의 예봉이 꺾인 격전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와도 연계된다.

강항의 간양록에는 ‘봄은 동녘에서 오는가, 한 많은 봄이로세/ 바람, 너는 서녘으로 간느냐, 맘만 들떠 바쁘이/ 새벽달, 어버이 한숨 실은 새벽달일세/ 밤길도 더듬더듬 헤매신다/ 촉대로 새운 밤을 그 누가 알랴/ 그 누가 알랴, 아침 햇빛에 복받치는 내 설움을/ 글방 옛터에 피고 진들 누가 알리/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고/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가 있으랴’이런 시를 읊조렸다.

당시 강항은 피난길에 이순신에게로 가려다가 논잠(論岑)포구(영광군 염산면)에서 왜놈 군대 도도 다카토라 수군에 포위된다. 일가족은 죽을 각오로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얕은 수심 때문에 왜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건져지고, 그 와중에 아들 용과 서녀 애생을 잃었다. 그들이 10여 일 동안 끌려가 닿은 곳은 일본 에히메현 오쓰시 나가하마 항구다.

강항은 그곳에서 승려 요시히토와 교류하며,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과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으로 엮어 몰래 조선으로 보냈다. 강항의 위패는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 있는 내산서원 모셔져 있다.

1968년 록그룹 애트킨즈로 데뷔한 조용필은 남인수·현인·나훈아·남진으로 이어지는 우리 대중가요계의 황제다. 그는 변신의 예술 가수다. 팝 발라드(그 겨울의 찻집)·포크(친구여)·디스코(단발머리)·펑크(못찾겠다 꾀꼬리)·트로트(허공)·민요(간양록)·가곡(선구자) 등이 변신의 산물 노래이다. 고희를 넘어선 가객의 장건(壯健)을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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