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니스트
장경덕 칼럼니스트

“옛말에도 있듯이 가격 인하는 바보도 할 수 있다.” 경영의 구루 마이클 포터가 ‘경쟁우위’에서 말했다. 포터는 “기업은 잠재적 도전자를 비용 면에서 현저히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는 방어 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했다. 규모의 경제를 누리는 기업과 달리 시장점유율이 낮은 도전자는 신제품 개발과 광고 비용 부담이 크다. 그러나 상품 가격을 내리면 점유율이 높은 기업이 부담하는 추가 비용이 도전자보다 커진다. 포터는 “가격을 인하하면 손해 보는 쪽은 도전자가 아니라 방어하려는 기업이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월마트는 도전자일 때도 수성할 때도 가격에 승부를 걸었다.

샘 월튼의 표현에 따르면 K마트는 “할인점 업계의 칭기즈칸”이었다. 1899년 창업자의 이름을 따 크레스지로 출범한 이 회사는 1962년 1월 K마트 간판을 건 첫 할인점을 열었다. 월마트 간판이 내걸리기 6개월 전이었다. 같은 해 3월 K마트가 미시간주 가든시티에 7400㎡의 풀사이즈 할인점을 냈을 때는 문을 열기도 전에 4000명이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기도 했다. K마트는 거침없이 내달리며 전국 곳곳에 매장을 열었으나 인구가 5만 명이 안 되는 도시에는 입점하지 않았다. 월마트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5000명 이하 소도시를 파고들었다. 대대적인 광고는 필요 없었다. 작은 도시에서 입소문으로 충분했다.

샘 월튼은 학창시절 미식축구팀에 들어간 후로 어떤 형태든 경쟁은 다 멋지다고 여겼다. 사실 경쟁은 그가 소매업을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할인점 업계의 역사에서는 한순간도 경쟁을 빼놓을 수 없다. 새로운 도전자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업계 최고의 자리를 꿈꾸며 준비하는 이들은 셀 수도 없다. (‘월마트, 두려움 없는 도전’) 월튼은 경쟁업체를 피하거나 그들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K마트에 도전하는 월마트는 월튼 스스로 말했듯이 “코끼리에 도전장을 내민 벼룩 한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정면 돌파를 택했다.

월튼은 경쟁이 기업을 더 날카롭게 벼려준다고 믿었다. K마트가 없었다면 월마트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매업계의 최강자였던 시어스는 월마트와 K마트를 다 무시했다. 할인점들이 소매업계의 파괴적 기술로 무장하고 덤벼올 때도 오랫동안 그들을 적수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어스는 훗날 K마트와 합쳐져 줄곧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 업계의 경쟁은 무엇보다 가격 인하 경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쇼핑객들은 이름 있는 브랜드를 가장 싸게 사고 싶어 한다. 1974년 월마트 관리 담당 부사장으로 승진한 잭 슈메이커는 ‘매일 최저가’(Every Day Low Price, EDLP) 정책을 도입했다.

1977년 월마트가 아칸소주 리틀록에 7호점을 냈을 때였다. 이 점포는 꽤 크고 장사가 잘됐는데 K마트가 파격적인 가격 인하로 공격을 개시했다. 월마트는 강경하게 맞붙었다. 매장 관리자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K마트가 우리보다 더 낮은 값으로 파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절대 최저가 매장 타이틀을 내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어느 날 매장 관리자가 크레스트 치약 가격이 6센트(지금 돈으로 78원)까지 떨어졌다는 보고했다. 경영진은 경쟁을 멈추지 말라고 했다. 결국 K마트는 월마트가 쉽사리 항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격경쟁을 멈췄다. 당시 K마트는 월마트의 20배나 되는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할인점 업계의 총마진율은 1960년대 초반 35%에 이르렀으나 1970년대 중반에는 22%로 떨어졌다. 경영효율을 극대화해 비용을 낮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간접비를 파격적으로 낮춰 5~7%의 마진율로 경쟁하는 도매업체도 나타났다. 창고형 매장이라는 신개념 할인점의 개척자인 솔 프라이스는 1976년 첫 프라이스클럽 매장을 열었다. 월튼은 1983년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대량구매 고객을 겨냥한 창고형 매장 샘스클럽을 열었다. 샘스클럽은 9년 만에 매출 100억 달러에 이를 정도로 가파른 성장을 기록했다. 할인점과 마찬가지로 창고형 매장이라는 개념 역시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이었다.

월튼은 경쟁업체 매장에 직접 가서 뭔가 배울 점이 없는지 살펴보는 걸 가장 재미있어했다. 늘 노트와 녹음기를 들고 다니면서 쉬지 않고 질문하며 필요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 한번은 샌디에이고의 프라이스클럽 매장에서 소형녹음기에 가격과 매장 정보를 기록하다 제지당했다. 직원이 녹음 내용을 삭제하려 하자 월튼은 로버트 프라이스 씨(솔 프라이스의 아들)에게 간단한 메모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매장 직원이 일을 아주 잘 하네요. 귀하의 매장을 둘러보며 몇몇 제품과 매장에 관한 느낌을 녹음기에 담았는데 제지당했습니다. 귀하는 당연히 녹음 내용을 확인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녹음기에는 다른 내용도 있으니 그 부분은 돌려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로버트 프라이스는 내용을 삭제하지 않고 녹음기를 돌려주었다.

샘 월튼은 1992년 4월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90년 월마트 매출이 K마트를 추월하는 것을 지켜봤다. 하지만 ‘모든 것을 판다(Everything Store)’는 디지털 제국의 출현을 내다보지는 못했다.

장경덕 작가·번역가

33년간 저널리스트로서 경제와 기업을 탐사했다.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정글 경제 특강』 등을 썼고 『21세기 자본』 『좁은 회랑』 등을 옮겼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