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종 이노비즈정책연구원장
김세종 이노비즈정책연구원장

최근 블러(blur)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원래 ‘희미한 것’ 또는 ‘흐릿해진다’는 의미인데 방송 화면에서 주변 인물을 알지 못하도록 처리하거나 CCTV 화면을 흐릿하게 처리한다는 용어로도 쓰인다. 여기에 big을 붙여 ‘big blur’로도 쓰이는데, 이 말은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생산자-소비자, 소기업-대기업, 온-오프라인, 제품과 서비스 간 경계가 급속하게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사물인터넷이나 인공지능 등 혁신적인 디지털 기술이 산업 생태계를 급변시킴에 따라 산업간, 업종간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실제로 산업현장에서는 다영한 분야의 ‘빅블러’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산업간 융복합이 나타나고 디지털 기술의 적용이 확대되면서 과거의 산업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업종의 출현이 빈번하다. 이에 따라 각종 인증 및 규격, 승인제도 등에서 변화가 필요하지만, 규제기관은 여전히 경로 의존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 기업 현장의 불만이다.

현장에서 만난 중소기업 특히 스타트업 대표들은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중소기업 관련 정책과 제도는 이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하소연 하곤 한다. 우선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국회에서의 입법은 더디기만 한 실정이다. 물론 입법과정이 정교하고 좀더 신중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현장의 목소리에도 귀를 열어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가 관행이나 제도에 매달려있는 동안 우리와 경쟁해야 하는 상대는 우리를 추월하거나 독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중소기업 정책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중소기업은 보호와 육성해야 한다는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는 사이에 중소기업의 자생력과 경쟁력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연구개발 지원은 공평하게 나누어주던지, 아니면 예산이 소진될 때까지 집행하는 일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해외의 정책을 벤치마킹하여 중소기업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해 왔다. 이러한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산업간, 업종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빅블러 시대에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중소기업 정책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기 위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책공급자가 지원대상을 선별하는 방식은 편의성에 비해 효율성은 낮다는 것이 정설이다. 더구나 대상을 선별하는데 중요한 기준이었던 업종의 경계, 산업의 특성, 정책대상 등이 모호해지고 있는 시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빅블러 현상은 디지털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소비행태의 변화와 맞물려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시장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경쟁자들이 끊임없이 출현하여 신구(新舊)산업간 경쟁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지원체계 개편은 불가피하다.

한가지 분명한 점은 정책환경이 기존 정책전달체계로는 정책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간다는 점이다. 이미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상적 재정지출이 급증하여 과거와 같이 중소기업 지출의 우선순위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중소기업 지원도 정책효과를 통해 지원의 당위성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그렇다면 융자 중심의 중소기업 자금지원이나 보조금 성격의 R&D 지원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출범한 이후 중소기업 정책에 대한 깊이와 범위가 확대된 것은 분명하지만, 정책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중소기업 정책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성이 있다. 그동안 익숙한 것에 대한 결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경로의존적인 정책추진 및 전달체계를 새롭게 재편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금융기관의 자금지원 방식을 융자 중심에서 투자 혹은 투융자 복합 방식으로 바꾸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집단지성의 힘을 모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R&D 지원방식도 현재와 같은 보조금 지급방식, 선별 방식, 관리방식 등에 대한 개편을 통해 사업화 성공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중소기업 정책의 당위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납세자들이 인정할 만한 제도 변화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산업간, 업종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빅블러 시대에는 과거 중소기업 정책의 대상, 수단, 전달체계 등의 변화가 불가피해지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중소기업 정책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기 위한 집단지성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노비즈정책연구원장 김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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