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칼럼니스트
장경덕 칼럼니스트

“무한책임을 지는 가족소유 구조는 오랫동안 우리 은행과 고객들에게 충실히 작동해왔습니다. ··· 모호한 회계 관행으로 숨겨놓은 불쾌한 손실은 없습니다. 10년간의 강한 성장세를 보인 후 우리의 자산은 약간 줄었습니다. 이 패턴은 영국 은행들 전반에 걸쳐 볼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 통화정책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우리 고객들이 1월에만 거의 10억 파운드(1조6000억 원)의 세금을 낸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7월 영국의 프라이빗뱅크인 C. 호어 앤드 컴퍼니의 수장 알렉산더 호어가 이해관계자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이 고색창연한 은행의 총자산은 68억 파운드(83억 달러) 남짓하다. 총부채(대부분 고객이 맡긴 돈이다)가 64억 파운드 가까이 되고 자기자본은 5억 파운드가 채 안 된다. 중국의 국영은행들을 빼면 세계 최대 은행인 JP모건 체이스의 자산은 3조7400억 달러에 이른다. JP모건의 역사는 1799년에 시작됐다. 하지만 비공개기업인 호어의 역사는 167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51년 동안 12대에 걸쳐 가족 기업으로 남았다.

중세 이래 영국에서는 금세공인이 금융 중개 기능을 맡아왔다. 17세기 이후 발견과 탐험의 시대에는 환전과 신용 수요가 크게 늘었다. 금세공인 도제였던 리처드 호어(1648~1719)는 주인이 죽자 사업을 물려받았다. 황금의 병을 상징물로 내건 그의 은행은 번창했다. 영란은행 설립에 반대할 만큼 영향력도 컸다. 그의 아들 굿 헨리(‘굿’은 자선 활동으로 얻은 별칭이다) 남해회사 거품 때 정점에서 주식을 팔아 횡재를 했다.

호어는 19세기 은행의 합병 바람을 거슬러 독자 생존을 택했다. 잉글랜드 내전과 두 차례 세계대전, 대공황과 숱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호어의 고객 중에는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예일대학으로 불멸의 이름을 갖게 된 무역업자 엘리후 예일과 인구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 소설가 제인 오스틴과 토머스 하디, 시인 바이런도 이 은행과 거래했다. 호어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챙기는 세심하고 믿을 만한 서비스로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영국의 가장 오래된 프라이빗뱅크도 일본 최장수 기업들의 역사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사찰 건축에 특화한 곤고구미(金剛組)라는 회사의 역사는 서기 57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6년 다른 건설회사에 인수됐지만 14세기 넘게 명맥을 이어온 회사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시카와현 고마쓰시의 호시료칸(法師旅館)은 2018년에 1300주년을 기념했다. 1637년부터 사케를 빚어온 겟케이칸(月桂冠)의 역사는 장수기업 반열에서 한참 밀린다.

“전통이란 타고 남은 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살이 있는 불을 꺼트리지 않고 넘겨주는 것입니다.” 1568년부터 유리를 만들어온 독일 포싱거 가문의 13대손 베네딕트의 말이다. 이 말은 세기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장수기업의 존재론적인 물음을 내포한다. 생존이냐, 성장이냐는 가족 기업의 근본적인 딜레마였다. 그들은 늘 안정이냐, 혁신이냐를 놓고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의 담금질을 견뎌내려면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돼 있어서는 안 된다. 혁신과 성장을 통해서만 안정과 생존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성공은 그만큼 지난하다.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의 모르텐 베네드센은 2019년 지구촌에서 200년 넘게 생존한 장수기업들의 성공 요인을 추출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세기를 뛰어넘은 가족 기업들은 무엇보다 오랫동안 무형의 자산을 지켜왔다. 가문의 명예를 건 사명과 역사, 유산, 평판, 네트워크, 독특한 기업 문화와 가치, 철학 같은 것은 어떤 유형자산보다 값진 것이었다. 이런 가족자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재를 끌어들이고, 동기를 부여하며, 이해관계자들의 충성을 끌어내고, 가치를 창출했다.

내외부의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몇 세기에 걸친 도전을 극복하는 지혜도 남달랐다. 내부적으로는 기업 통제를 둘러싼 가족 간 불화와 능력이 부족한 다음 세대로 경영권 승계가 이뤄질 때 직면하는 위험에 슬기롭게 대응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외부적으로는 경쟁자들과 맞서기 위해 신속히 자본을 조달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누구든 한 왕조의 문을 닫았다는 오명을 쓰고 싶지 않아 한다. 질서 있는 승계를 이어가면서도 외부인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깰 수 없는 유리 천장은 인재 영입을 어렵게 한다.

장수기업은 생존 자체가 큰 성취다. 하지만 몇 세기에 걸쳐 맞닥뜨리는 온갖 격변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기업의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제품과 전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모순적인 말처럼 들린다. 단순한 일반론은 기업의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에서 유용한 나침반이 되기 어렵다. 살아있는 교훈을 얻으려면 실제 성공과 실패의 사례를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장경덕 작가·번역가

33년간 저널리스트로서 경제와 기업을 탐사했다.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정글 경제 특강』 등을 썼고 『21세기 자본』 『좁은 회랑』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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