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명가수는 다르다. 이런 가수는 그가 부르는 노래나, 가창 스타일이 바로 하나의 장르가 된다.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서 나훈아를 가요황제라고 지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문학과 음악과 철학과 통속이 영글어 있다.

나훈아가 새 노래 <기장 갈매기>를 절창하며 갈매기 너울춤을 춘다. 그는 스스로를 해운대 앞바다와 오륙도 허공중을 빙빙 돌면서 사랑의 유랑 춤을 추는 갈매기로 은유했다. 이 곡은 나훈아의 《새벽 six story》에 담긴, 어차피 사랑이란 왔다가 가는 파도에 비유한 연가이다.

동쪽에서 바라보면 여섯 개로 보이고 / 서쪽에서 쳐다보면 다섯 개로 보이는 / 오륙도 돌고 돌며 나래 치는 / 내가 바로 내가 바로 기장 갈매기다 / 사랑 따윈 누가 뭐래도 믿지 않는다 / 이별 따윈 상관없다 떠나든 말든 / 어차피 사랑이란 왔다가는 파도처럼 / 가버리면 그만인 거야/ 오늘은 해운대서 사랑을 하고 / 내일은 영도에서 이별을 하고 / 또다시 남천동의 밤을 꼬신다 / 내가 바로 기장 갈매기다.

노랫말이 매정하다. 사랑 따윈 누가 뭐래도 믿지 않는다. 이별 따윈 상관없다 떠나든 말든. 어차피 사랑이란 왔다가는 파도처럼, 가버리면 그만 인 거야. 지독한 반어(反語)의 절규다. 가버리면 그만인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었다는 증표다.

왜, 노래 제목에 기장이라는 지역 명칭을 특정하였을까. 나훈아(본명 최홍기)의 고향은 부산 동구 초량동이다. 아버지는 무역선 선원이어서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이었고, 초량초·대동중을 졸업하고 서울 서라벌고로 진학하였으니, 딱히 기장과 연줄을 댈 끈이 없다. 다만 기장군은 부산광역시의 유일한 군(郡)이다. 1995년 도농통합시 행정 체제를 유지한 데서 연유한다. 인천광역시 옹진군·강화군, 대구의 달성군, 울산의 울주군과 같다. 광역자치단체의 든든한 울타리 같은 곳곳이다.

부산의 동북쪽 끝자락 기장에서 남녘으로 나래짓을 하면, 청사포와 달맞이고개를 넘어 해운대 모래사장에 이른다. 그 오른편이 동백섬이고, 바다 허공중 아래 오륙도가 가물거린다. 이 오륙도 안쪽이 광안리 해변에서 이어지는 부산항이고, 건너편이 태종대가 있는 영도이다. 그래서 북쪽 끝에서 날아오르는 갈매기가 남서쪽 끝자락 다대포 몰운대까지 돌고 돌아오는 영역의 기점으로 삼은 듯하다.

오륙도는 영도(절영도) 동쪽에 있다. 봉우리와 산의 모양이 기이하고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어,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이 중에서 육지 쪽에 가장 가까운 우삭도는 밀물 때 솔섬과 방패섬이라는 2개의 섬으로 분리되다가 썰물 때는 하나의 섬으로 된다.

오륙도를 모티브로 한 유행가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차은희의 <한 많은 오륙도>가 있다. 조용필의 노래는, 1975년 9월 일본에 거주하던 조총련 모국방문단(추석고향방문단)이 부산항에 입항할 당시에 울려 퍼진 노래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차은희의 노래는 부산항을 떠나 울릉도로 가는 배가 오륙도를 돌아가며 가물거리는 뒷모습을 얽은 곡이다.

해운대는 신라 학자 최치원(857~908)이 당나라 장안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지식이 넘친 나머지 세속과 화의하지 못하고 떠돌던 중, 절로 들어가려던 길에 우연히 이곳에 들렀는데, 주변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동백섬 동쪽 벼랑의 넓은 바위 위에 해운대(海雲臺)라고 음각으로 새긴 데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이곳을 서정한 유행가는 《얼굴없는가수》로 불리다가, 2003년 77세에 가장 나이 많은 신인 가수로 가수협회에 등록했던 손인호의 목청을 넘어온 <해운대 엘레지>이다. 바다마저도 잠이 들었나 밤이 깊은 해운대~.

영도는 부산만 남서쪽에 있는 섬, 전체가 영도구에 해당하며, 1934년 11월과 1981년 1월에 개통된 영도대교와 부산대교가 부산 도심지와 이어준다. 이곳은 예로부터 말 사육장으로 목도(牧島)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이곳에서 사육된 말이 너무 빨리 달려서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고 하여,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렸다.

그 남쪽 반대편이 태종대, 옛날에 신선이 살던 곳이라 하여 신선대라고도 부른다. 태종대라는 이름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603~661)의 사후(射侯, 활 과녁)이 있었으므로 태종대라고 불렸단다. 이 태종대를 서정한 유행가는 김광남의 <태종대 에레지>, 윤종호의 <추억의 태종대> 등이 있다.

노래 속 남천동은 수영구 남쪽 끝에 있으며, 금련산에서 흘러내려 수영만으로 유입되는 남쪽 시내인 남천(南川)에서 유래한다. 이곳은 1980년대 부산의 압구정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빛이 번쩍이던 거리였다. 1992년 나훈아는 이곳을 서정한 <남천동 불루스>를 불렀다. 못 잊어 다시 찾은 거리 남천동 밤거리. 밤 파도는 여전한데 사람은 오간 데 없고~. 이어지는 <기장 갈매기> 2절도 절절하다.

내 청춘은 누가 뭐래도 의리 하나다 / 빈 주머닌 상관없다 없어도 그만 / 어차피 인생이란 밀물처럼 왔다가 / 썰물처럼 가버리는 것 / 오늘은 다대포에서 낙조에 취하고 / 내일은 송도에서 일출에 잠 깨고 / 내친김에 광안대교도 접수를 한다 / 내가 바로 기장 갈매기다 / 내가 바로 기장 갈매기다.

다대포는 낙동강하구 최남단에 있는 다대반도와 두송반도에 둘러싸여 있으며, 5개의 작은 만(灣, 물굽이)이다. 지명의 유래는 큰 포구가 많은 바다라는 데서 비롯되며, 1592년 4월 13일, 왜군(일본) 수군이 공격해온 임진왜란 첫날 다대포 첨사였던 윤흥신과 그의 동생 흥제가 접전을 벌여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는 전국에, 비상경보를 전파하는 600여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이곳에는 봉수군들이 교대로 상주하면서 근무를 했다. 임진왜란 발생 첫날 부산 다대포 봉수대에서 중간의 38개 봉수대를 거쳐 서울 남산 경봉수대까지 전파된 시간이 12시간이었단다. 1개 봉수대마다 20분 이내로 경보가 전달된 셈이다.

선조 임금의 조정은 엉성했지만, 경보전달체계는 살아있었음이다. 그 당시 봉수 경로는 크게 다섯 경로였으며, 함경도 두만강변 경성 근처, 평안도 압록강변 근처, 부산 태종대 다대포, 전라도 여수 순천 등등이 그 시발지였다. 이 다대포를 서정한 유행가는 이미자의 <다대포 처녀>이다.

광안대교는 수영구 남천동과 해운대구 우동 센텀시티를 연결하는 다리다. 광안리해수욕장 전면을 가로지르는 웅장한 규모와 함께 시간대별, 요일별, 계절별로 10만 가지 이상의 다양한 색상을 낼 수 있는 조명시설을 갖추어, 탁월한 해상경관을 연출하기에 다이아몬드브릿지로도 불린다. 이 다리 아래 모래사장이 광안리해수욕장인데, 1991년 우리나라에 노래방기계가 도입된 이래로, 최초로 노래방사업자로 등록한 곳이 여기, 《하와이안비치노래방》이라고 한다.

우리 유행가 100년 역사에 갈매기를 모티브로 했던 노래는 많다. 1935년 고복수의 <갈매기 신세>, 1937년 이난영의 <해조곡>(갈매기 바다 위에 날지 말아요~)을 꼽을 수가 있다. 뒤를 이은 노래들이 손인호의 <갈매기 사랑>, 차은희의 <갈매기 쌍쌍>, 은방울자매의 <갈매기 우는 항구>, 주현미의 <인천항 갈매기야>, 나훈아의 <갈매기) 등이다.

나훈아는 <기장 갈매기>에 왜, 부산의 상징인 동백섬과 용두산을 불러내지 않았을까. 동백섬은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에서 유래하였다. 겨울에서 봄 사이 동백나무에서 떨어진 꽃이 땅에 쌓이면 지나가는 사람과 말발굽에 밟히는 것이 3∼4치나 되었단다. 달맞이 고개, 청사포도 불러내지 않았다.

고희의 고갯길을 돌고 돌아가는 인생 나그네, 나훈아의 인생 시계는 몇 시일까.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 나를 버린 사람보다 네가 더욱 야속하더라~. 그의 절창 <고장 난 벽시계>를 <기장 갈매기>에 엇대어 보면서, 예술철학가객 황제의 갈매기 넉살을 떠올려본다.

<기장 갈매기>를 담은 나훈아의 《새벽 6-Story》는, <삶·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사랑이야·아름다운 이별·타투·가시버시·기장 갈매기>이다. 나훈아, 최홍기는 그 자체가 우리 노래 100년사에 하나의 걸출한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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