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섬은 몇이나 될까. 그 섬을 오가는 배는 몇 척이나 될까.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을 싣고 오는가. 또 몇 날 뒤, 기약 없이 멀어져가는 저 배는 무슨 꿈을 남겨 두고 떠나가는가. 오는 배는 마음을 설레게 하고, 가는 배는 야속하고 무정한 눈길을 뒤로 하고 멀어져 간다. 우리나라는, 항구·부두·포구·선창·나루터가 유난히 많다. 3천여 개의 섬, 절반가량이 사람이 산다. 이별과 상봉의 서정이 새벽안개처럼 피고 지는 그곳은, 우리 민족 삶의 내력과 맞닿아 있다.

1979년 김트리오의 목청을 넘어 세상에 나온, 인천항 서정을 얽은 <연안부두>가 이런 유행가의 백미(白眉)다. 이 노래를 부른 혼성3인조 그룹 김트리오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부른 이해연의 자녀다. 아버지는 미8군무대를 대상으로 공연 기획 연예인 출연을 프로모션하던 트럼펫 연주자 베니김(김영순)이다. 3남매는 김 파·단·선, 2남1녀이다. 화양흥업을 운영하던 김영순은 1958년 김혜자를 린다김·패티김으로 미8군무대에 데뷔시킨 장본이다.

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 오는 사람 가는 사람 /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 말해다오 말해다오 / 연안 부두 떠나는 배야 // 바람이 불면 파도가 울고 / 배 떠나면 나도 운단다 / 안갯속에 가물가물 / 정든 사람 손을 흔드네 / 저무는 연안 부두 외로운 불빛 / 홀로 선 이 마음을 달래주는데 / 말해다오 말해다오 / 연안 부두 떠나는 배야.

이 노래는 1973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김트리오가 가족과 함께 일시 귀국했던 시기(1979년 3월)에 맞춰 발표했던 곡조다. 아버지 베니김의 지인 안치행의 안타기획이 프로듀싱을 했다. 트로트와 록과 펑크(funk) 리듬을 결합한 <연안부두>는 히트했다. 시대 상황과도 맥락이 닿았다. 1980년 서울의 봄, 뒤이어진 3S(스포츠·섹스·스크린) 정책의 바람결에 흥행 깃발을 펄럭거린다. 프로스포츠단이 창단되어 풀 리그 경기를 하면서 대중들의 감흥을 부추기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으로 이어진다.

1982년 3월 27일 역사적인 개막경기를 한, 우리나라 프로야구 경기장은 대형 향토(애향)노래방을 방불케 했다. 야구경기장마다 고향노래 떼창이 풍성거렸다. 초창기 서울은 MBC청룡, 부산·경남은 롯데자이언츠, 대구·경북은 삼성라이온즈, 광주·전라는 해태타이거즈, 대전·충청은 OB베어즈, 인천경기강원은 삼미슈퍼스타즈 등 6개 팀이었다. 인천 문학경기장의 응원가는 <연안부두>, 광주 무등경기장에는 <남행열차>, 부산 사직구장에는 <부산갈매기>가 하늘을 우렁우렁 울렸다. 유행가가 애향심으로, 나아가서는 애국심으로 승화되는 마력(魔力)을 가지고 있음의 증표이다.

<연안부두> 노래 배경지 연안부두(沿岸埠頭)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일대다. 이곳에서는 대청도·연평도·덕적도·이작도·백령도 등 100여 개 섬과 제주도를 정기 운항하는 여객선이 드나든다. 중국 여러 도시로 출항하는 국제여객터미널도 이 일대다.

인천항은 우리나라 근현대역사의 축소판이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의 본 터다. 1876년 일본과의 굴욕외교, 강화도조약으로 3포(부산포 1876, 원산포 1880, 제물포 1883)가 개항된 본거지다. 원산포를 제물포보다 먼저 개항시킨 이유는, 함경도 지역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천연림(목재)을 일본 서쪽 바다에 접한 항구(니가타 항 등)로 빼내어 가기 위한, 일본 사람들 의도가 도사려진 결과였으리라.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도 인천항이다.

제물포(濟物浦)라는 이름도 그렇다. 여러 가지 물건이 있는 포구. 구한말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던 인천의 별칭이다. 인천시는 해방 직후인 1945.10.10.~10.27 사이에 제물포시로 불린 적이 있다. 불과 17일간이다. 1883년(고종 20) 제물포에 인천감리서가 설치되면서 읍치가 관교동에서 제물포로 이전하였다. 이후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 지방 관제 개편으로 전국을 23부로 구획할 때 인천부가 되었다. 현재의 인천 이름이 된 것은 1949년 8월 15일로 인천시로 개칭한데서 유래한다.

제물포는 조선 시대에 제물 진(鎭)이 설치되어 수군만호(해안경비대)가 주둔하였으나, 효종(1619~1659)때 강화도로 옮겼다. 효종이 북벌계획을 수립할 때 제물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수로를 개척하여 유사시에 왕이 머무를 수 있는 행궁(行宮)을 월미도에 지었으며, 제물량(梁)에는 수륙양군(육군+해군)을 배치하고 2척의 배를 대기시켰다. 제물포 지명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옛 지명인 미추나 매소는, 거친 들판(맷골)·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는 뜻이다.

<연안부두> 노랫말을 지은 조운파는 1943년 부여군 은산면에서 출생 본명 조대원이다. 그는 대중가요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예술가다. 해군 부사관으로 근무(7년)하고 전역한 뒤 서울에서 순수문학 동인회에 참여했다. 스스로 시를 쓰되 발표는 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시화전을 주로 하였으며, 그때 필명이 조운파다. 그러던 어느 날 작사가 박건호(1949~2007)가 자신의 시집을 들고 찾아와 문학동인 활동을 청하여 같이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노랫말을 쓰는 계기도 된다. 순수문학에 대중예술의 옷을 입히기 시작한 셈이다. 조운파는 1982년 <바람 부는 세상>으로 MBC최우수작사상을 받았다. ‘아이야 인생을 알려거든/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아라...’

<연안부두>를 작곡한 안치행은 영사운드 출신이다. 1972년부터 활동하였지만, 1967년에 결성되어 미8군무대에서 활동한 실버코인스가 이들의 모태다. 그룹의 주인공은 안치행(기타)·유영춘(보컬)·장현종(키보드)이었다. 유영춘은 원래 히파이브(He 5) 멤버였다. 그는 1942년 진도에서도 또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인 가사도 출생이다. 진도는 미스트롯 송가인의 고향이고, <금산아가씨>를 부른 김하정과 동향이기도 하다.

그는 이리농고 2학년 때 황해악극단에서 실습생을 모집하자, 부모님이 운영하던 제과점에서 돈을 은근슬쩍 빼내어 악극단을 따라 가출했다. 그의 인생 이정표 같은 곡은 고영준 가수의 아버지 고복수의 <타향살이>(원곡, 타향)다. 이 가락에 마음을 빼앗겨 독학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기타를 도입한 사람은 박시춘, 1930년대 전후의 일이다. 1913년 밀양 기생집 아들로 태어난 본명 박순동의 예술 인생도 가출에서 시작되었다. 안동 극장 호객꾼, 여수 유성기점으로의 동행, 일본으로의 일탈..., 그의 필명은 시춘(是春), 언제나 봄날이다.

안치행은 독학으로 습득한 기타실력으로 기타 학원도 열었다. 그 시절 이리·군산의 읍면에서 노래자랑대회도 개최했단다. 1966년 정식으로 기타를 배우려고 서울 을지로에 있던 이인성음악학원을 찾아갔다. 여기서 테스트를 받은 후 서영춘과 그 일행이 활약하던 악극단 20세기컨츄리쇼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이즈음 조로라는 친구가 록밴드 결성을 제안하자, 안치행은 베이스 기타를 맡은 오덕기와 함께 3인조 그룹을 편성했다. 이후 5년 정도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이들은 1970년 조선호텔 옥상에 생긴 나이트클럽에 출연하면서, 밴드 이름을 젊은소리라는 뜻의 영사운드로 변경했다.

우리나라 섬은 3천3백여 개다. 오늘날은 연육교 연도교 등으로 뭍과 섬끼리 이어진 곳이 많으니, 이 수치 또한 살필 일이리라. 이 중 사람이 사는 섬은 4백7십여 개, 2천8백여 개에는 바람과 이름 모를 풀꽃과 새들이 살아간다. 여기 사람이 사는 섬에는 연락선이 오고 간다. 인천항 연안부두에서는 100여 개의 섬으로, 목포항에서는 60여 개의 섬으로.... 항구의 이별과 상봉 서정을 머금은 노래는 남진의 <가슴아프게>(원곡 이름, 낙도 가는 연락선)에도 매달려 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아침저녁으로 쌀랑한 기운이 감도는 날 낮 햇살이 맑다. 연안부두 해변가의 주막집, 소주잔 곁에서 지글거리는 연탄불 군내음이 그립다.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을 싣고 오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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