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유차영 대중가요 평론가·한국콜마 연수원장

기도하는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어떤 모양일까. 그것이 궁금하면 철새에게 물어보시라. 당신의 가슴팍에 한평생 무상으로 세(貰) 들어 사는 첫사랑은 비련인가 미련인가. 앞의 경우이면, 끝나지 않은 사랑을 품은 익지 않는 그리움이고, 후자이면 시작하지도 못하고 가슴속에 매달린 멍울진 사랑이다.

1982년 가요 황제 조용필이 부른 <비련>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사람들은 애절한 노래를 즐기면서도, 스스로가 노래 속의 주인공인 삶을 살기는 꺼려한다. 하지만 어쩌랴, 사람들 절대다수가 비련의 멍울을 머금고 살아가고 있으니...

<비련> 노래는 2021년 트롯 전국체전에서 신승태의 목청에 걸려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하면서, 대중들을 노래 속의 주인공으로 승화시켰다. 기도하는 손길, 포옹하는 가슴팍에 몰아치는 비바람 같은 그리움의 사연을, 저 멀리 시베리아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오신 철새에게 물어보면서...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 떨리는 그대를 안고 / 포옹하는 가슴과 가슴이 / 전하는 사랑의 손길 / 돌고 도는 계절의 / 바람 속에서 / 이별하는 시련의 돌을 던지네 / 아 눈물은 두 뺨에 흐르고 / 그대의 입술을 깨무네 / 용서하오 밀리는 파도를 / 물새에게 물어보리라 / 물어보리라 / 몰아치는 비바람을 / 철새에게 물어보리라.

노래 주인공은 돌고 도는 계절의 바람 속에서 철새에게 묻는다. 몰아치는 비바람 같은 그리움의 사연을. <비련> 노래를 발표할 당시 조용필은 32세였다. 2021년 신승태가 <비련>을 경기민요 <한오백년>(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세상~)과 버무려서 절창을 한 날, 조용필은 고희의 고개를 넘어 신청춘(新靑春)의 세월 나그네로 익어가고 있었다.

조용필은 노래에는 황제이지만, 해로동반의 인생 여정에서는 비련(悲戀)의 아쉬움을 안고 살아간다. 가황 스스로는 운명으로 여길까, 팬덤 입장에서는 숙명으로 애석해야 할까. 하지만 조물주는 신명(神命)으로 가름하고 있지 않을까. 그날 신승태는 <비련>을 창호지 위에 먹물을 흘리는 수묵화를 그리듯이 절창했다.

비련이라는 단어는 두 발로 지구 위를 걸어 다니면서 살다가 간 230억여 명의 가슴팍에 수놓아진 애련의 그림이다. 지난날 이태리 산레모 페스티벌에서 밀바와 프랑스의 리샤르 안토니가 부른 칸초네, <당신들 누구 하나>란 곡도 우리나라에서는 <비련>이란 제목으로 불렸다. ‘당신들 누구 하나/ 그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는군요/ 진실을 말해주세요/ 이제 와서 당신들의 동정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조용필의 <비련>, 노랫말을 뒤이어 펼친다.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 떨리는 그대를 안고 / 포옹하는 가슴과 가슴이 / 전하는 사랑의 손길 / 돌고 도는 계절의 바람 속에서 / 이별하는 시련의 돌을 던지네 / 아 눈물은 두 뺨에 흐르고 / 그대의 입술을 깨무네 / 용서하오 밀리는 파도를 / 물새에게 물어보리라 / 철새에게 물어보리라...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 비련을 모티브로 한 노래를 펼쳐보자. 1939년 이인권이 부른 <비련의 출발>이다. ‘아~ 잘 있거라 아~ 나는 간다/ 발버둥 치는 내 마음을/ 낸들 어이 모르랴/ 운명이란 쇠사슬에 울다가 웃었다가/ 얽힌 내 사랑 응~/ 뜨내길 믿으면 소용이 있느냐.’

1966 이미자가 부른 <비련>을 보시라. ‘내 님은 모르시네 서러운 사연/ 한송이 꽃과 같이 행복하다가/ 비바람이 이다지도 모질 줄이야/ 마음이나 주지 말 것을 상처 난 비련/ 내 님은 야속하네 기막힌 사연/ 별처럼 반짝이며 꿈을 꾸다가/ 그 행복이 그렇게도 깨질 줄이야/ 사랑이나 하지 말 것을 상처 난 비련.’

1967년 문주란의 <비련의 부르스>는 어떤가. ‘바람이 나뭇잎을 쉴새 없이 스쳐 갈 때/ 사랑 없는 세월이 함께 흐르고/ 혼자서 걸어보는 그 날 그 자리에/ 그리움만 남아서 흐느껴 운다.../ 아~ 이토록 만났다/ 서럽게 헤어질 줄이야.’

가요황제 조용필의 <비련>에는 눈물겨운 감동 이야기가 대롱거린다. 그의 매니저였던 최동규의 전갈이다. 조용필이 1982년 4집 발매 후, 한창 바쁠 때 시골의 요양병원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병원장은 자신의 병원에 입원 중인 14세 지체 장애 여자아이가 노래 <비련>을 듣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는 것.

그 환자는 입원 8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의 감정을 내보인 것이었단다. 병원장은 이 소녀의 보호자로부터 돈은 원하는 만큼 줄 테니, 조용필이 직접 이 소녀에게 <비련>을 불러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했고, 아니면 병원을 방문하여 얼굴이라도 보여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이었단다. 매니저가 가요 황제에게 이 내용을 전했더니, 가황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로 툭 끄고, ‘병원으로 출발하자’고 했단다.

그날 예약된 행사가 4개였었는데, 모두 취소함과 동시에 위약금을 물고 시골 요양병원으로 달려갔던 것. 조용필이 병실에 들어선 순간, 소녀는 아무 표정도 없이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때부터 기적이 시작되었다.

가황이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부르기 시작하자, 그 소녀가 펑펑 울기 시작했고, 이 소녀의 부모도 따라서 울었다. 가황은 이 환자를 안아주며, 직접 사인을 한 비련 CD를 건네주고서 돌아섰다. ‘돈을 어디로, 얼마나 보내드리면 될까요?’라고 묻는 부모의 정성에, 가황은 ‘따님이 오늘 흘린 눈물이 제가 평생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 될 돈보다 더 비쌉니다.’라는 응원을 보냈단다.

조용필의 히트곡 중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는 첫 부인 박지숙과 관련 곡이고, <진>은 고인이 된 두 번째 부인 안진현을 위한 추모곡이다.

가요 황제는 1984년 3월 1일, 경기도 남양주군 광릉수목원 근처 봉선사에서 공휴일 007백년가약을 세상이 들썩거리지 않게 맺었다. <일편단심 민들레야> 노래로 프로포즈를 할 당시, 첫 부인 박지숙은 조용필보다 6세 아래로 26세였다. 박지숙은 <단발머리>로 조용필을 만나, <창밖의 여자>로서 밀행하듯 사랑하다가 결국 절간에서 촛불을 밝힌 것이다.

그들의 첫 만남은 1975년 조용필이 출연하던 라이언즈 호텔 커피숍이었고, 조용필과 잘 아는 이회택과 친한 축구선수였던 박지숙의 큰 오빠를 따라 나온 우연이었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거친 후, 결혼을 하지만 3년 뒤 각자의 길로 돌아선다. 비련은 아니다. 가정을 이뤘다가 서로의 방향을 전환했으니까.

그로부터 꼭 10년 뒤 가요 황제는 한국계 미국인 로비스트 안진현과 여의도 63빌딩에서 결혼하였지만, 7년여 만에 사별하였다. 그 피앙새가 남긴 유물도 가요황제는 세상 어두운 곳을 향하여 내밀었다. 그리고 종종 하늘 가신 부인(진)의 묘소를 찾아 생꽃을 선사한단다. 가슴 짠한 사랑스토리다.

가요에는 황제인 조용필 반려의 복은 어느 모롱이에 숨어 있는 꾀꼬리일까. 가황도 찾지 못하는 소쩍이 같은 접동새. 아~ 가요 황제의 애끓는 비련이여, 대답하시라 물새여~ 철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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