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작가·번역가
장경덕 작가·번역가

아틀라스(ATLAS) 프로젝트. 스위스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의 거대 하드론 충돌기를 만들기 위한 네 가지 연구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우주의 가장 깊은 비밀을 밝히기 위한 이 프로젝트는 1992년에 시작됐다. 180개 기관의 과학자 3000명이 참여하는 컨소시엄은 스위스의 시골에서 높이 45m 길이 25m짜리 입자 충돌기를 만들어야 했다. 부품은 1000만 개를 넘었다. 조직 설계에 나선 아틀라스 컨소시엄은 딜레마에 부딪혔다. 이제껏 보지 못한 것을 만드는 수백 개의 하위 팀이 가장 효과적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율성이 높은 팀은 창의적인 문제 해결에 뛰어났다. 하지만 높은 수준의 조정은 어려웠다. 그와 반대로 중앙에 권한이 집중된 조직은 시스템 통합에 유리했지만 한 번도 맞닥뜨린 적이 없는 문제들에 압도될 수 있었다. 하향식 조직은 가장 독립적인 과학자들의 거센 저항을 받을 것이었다. 설계자들은 고심 끝에 상향식 조직구조를 채택했다. 프로젝트 고위 관리자 대신 동료들끼리 조정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하부시스템이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자체 위원회를 두었다. 시스템 간 문제가 발생하면 임시로 워킹그룹을 만들어 해법을 찾았다. 전략적 수준의 주요 결정은 협력위원회에서 다루었다.

아틀라스 프로젝트를 제때 예산 범위 내에서 실현하는 데는 엄청난 리더십과 창의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피라미드 같은 위계 구조는 필요 없었다. 모두가 동료였고 누구도 보스가 아니었다. 이처럼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조직이 하향식으로 움직이면 속도를 낼 수 없다. 초인이 아닌 한 처음 보는 수백 수천 가지 문제에 제때 올바른 결정을 내려줄 만큼 폭넓고 깊은 경험과 지식을 갖출 리더는 없다. 조직의 변방에서 나쁜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문제는 곪게 된다. 게다가 보스가 자신의 낡은 신념에 얽매여 있으면 최악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바로 그런 문제에 부딪힌 적이 있었다. 1980년대에 PC 중심 비즈니스모델로 글로벌 거인이 된 이 회사는 그 후 10년 동안은 기술과 시장의 변화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전문성이 부족할 리는 없었다. 거대 조직 내 어디에선가 젊은 기술자들이 첨단 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최고위 경영진에 이르기도 전에 흐지부지되고 잊혀버렸다.

마이크로소프트 경영진은 구글의 놀라운 검색엔진이 나온 지 5년 후에야 그와 경쟁할 서비스 개발을 위해 1억 달러를 책정했다. ‘언더도그’라는 그 프로젝트를 이끌게 된 젊은 부사장 크리스 페인은 여러 해 동안 구글을 추적하며 회장이자 최고 소프트웨어 설계자인 빌 게이츠를 만나려고 애썼다. 마침내 그 만남이 이뤄졌을 때 구글은 이미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애플 아이패드가 나오기 한 해 전인 2009년 마이크로소프트 개발팀은 CEO인 스티브 발머에게 태블릿 시제품을 들고 갔다. ‘쿠리어’라는 암호명의 태블릿을 본 발머는 왜 윈도 운영체제를 쓰지 않느냐며 화를 냈다. 대답이 마음에 안 들자 프로젝트를 접게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애플 맥), 다이얼 업 인터넷(AOL), 웹브라우저(넷스케이프), 디지털 뮤직(아이팟), 온라인 비디오(유튜브), 클라우드 서비스(아마존), 스마트폰(아이폰)에서도 먼저 치고 나가지 못했다. 게이츠와 발머는 휴대폰을 주머니 속 컴퓨터로 보지 않았다. 2007년 발머는 이렇게 단언했다. “아이폰이 의미 있는 수준으로 시장점유율을 올릴 가능성은 없어. 전혀 없어.” 그로부터 12년 후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안드로이드보다 먼저 치고 나갈 수도 있었다며 후회했다. 4000억 달러짜리 실패였다.

경영학자 게리 해멀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근시안을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의 잘못으로 돌리기는 쉽지만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몇 안 되는 최고 경영진에게 전략적 결정을 할 권한이 집중된 위계적인 조직구조에 있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리더는 누구보다 멀리 보고 호기심 많고 창의적일 것으로 기대되지만 그들이 언제나 그런 역량을 보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멀은 무엇보다 고위 경영자들이 과거에 투자한 지적 자본이 너무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통 60대 안팎인 CEO들이 그 자리에 적어도 10여 년을 머물면서 고객과 기술, 경쟁 환경에 관한 과거의 경험과 사고의 틀을 버리지 못했다. 제때 감가상각해야 할 지적 자본을 털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 근시안은 위계 구조의 아래로 전이됐다.

해법은 기업의 관료조직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서 나온다.        

장경덕 작가·번역가

33년간 저널리스트로서 경제와 기업을 탐사했다.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정글 경제 특강』 등을 썼고 『21세기 자본』 『좁은 회랑』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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