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 한국유행가연구원장
유차영 한국유행가연구원장

우리 민족의 젖줄 한강 상공(허공)에 걸어서만 건너는, 하늘다리를 건설하자. 파리의 에펠탑 같은 상징을 건설하자. 아파트 1백 층 정도의 높이에 층층별 오솔길 같은 난간을 지으면(걸치면) 좋겠다. 여기저기 공간에 회합을 열 수 있는 장소, 연주회를 열 수 있는 마당, 먼 강줄기를 감상할 수 있는 허허로운 공간이 마련되면 좋으리.

이 지구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큰,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하늘다리 걸음다리 도보교(徒步橋). 이름은 한강하늘다리, 한강도보교(漢江徒步橋, Hankang Walk Bridge), 혹은 한강허공길(漢江虛空道)라고 하면 어떨까. 한강걸음다리도 좋으련.

이런 꿈을 제언하면서, 1983년 가요황제 조용필의 목청을 타고 세상에 나와서, 우리 민족의 가슴팍을 요동치게 한 노래 <한강>을 음유해보자. 한 굽이 돌아 돌아 맺힌 설움과, 또 한 굽이 돌아 돌아 억년 세월을 이어온 민족의 젖줄 큰 강이 머금고 있는 사연을 풀어헤치면서, 다시 큰 꿈 하나를 매달아 보자. 이 또한 새로운 한강의 기적이 되련.

한 굽이 돌아 흐르는 설움 / 두 굽이 돌아 넘치는 사랑 / 오우~ 한 아름 햇살 받아 / 물 그림 그려 놓고 / 밤이면 달빛 받아 / 설움을 지웠다오 / 억년에 숨소리로 휘감기는 세월 / 억년에 물결은 여민 가슴에 / 출렁이는 소리 / 한강은 흘러간다

때로는 출렁거리는, 또는 잔잔한 물결이 노랫말에 넘실거린다. 낮이면 은빛 햇살을 머금고, 고적한 밤이면 비단결 달빛을 끌어당기는 신비를 머금었다. 그렇게 억년 세월 강은 함묵(含黙)하고, 강물은 흘러갔고, 서울은 한강의 기적을 경신(更新)하면서, 서른여 개의 다리(대교·철교)를 물 위에 걸치고 있고, 강바닥 아래 여러 개의 지하철 통로를 품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한강 상공의 허공중에 걸어서만 건너는 다리 하나를 세우자는 것이다. 이런 큰 것 하나, 제대로 지어낼 걸출하고 간 큰, 내 님(者)은 어디에 계시나. 졸부처럼 눈앞에 던져질 불똥(票, 투표 표)에 간들거리는 소인배들 다~ 물렀거라, 큰 님(나라의 선구적 지도자) 나오신다.

한강하늘다리, 한강걸음다리~ 마음먹기에 달렸지 못해낼 일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면 이 다리는 대한민국의 상징, 서울의 심볼, 인류의 명물이 될 터이다. 이 다리를 향하여 지구촌 인류가 몰려들 것이다.

한강 중지도(노들섬) 노들물나루 위 허공중을 이어주면 좋겠다. 뚝섬 근처 동호물나루 상공이면 어떤가. 이러한 꿈을 꾸고, 이 꿈을 현실 속의 구조물로 지어낼 나라(대한민국)의 큰 지도자는 언제쯤 나타날까.

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백두대간 중 해발고도 1,418미터 금대봉의 산허리 800미터 지점이 발원지다. 고목나무와 바위 틈새에서 솟은 샘물이 검룡소에 고였다가,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해구(海口)까지, 494km를 유장하게 흐른다. 서울을 통과하는 한강의 폭은 6백~1천2백 미터로 프랑스 파리 센 강보다 3~5배 정도 넓은 강이다.

한강이라는 이름은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서 한(漢)은 큰·한 창을 뜻하며, 가람은 강이다. 한강은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대수(大水)라 불리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강으로 불리게 된 시기는, 백제가 중국 동진과 교류하기 시작한 즈음, 그때부터 한수 또는 한강이라 불렀고, 백제 시대에는 욱리하(郁里河)라고 불렀다. 신라에서는 한산하(漢山河) 왕봉하(王逢河)라고도 불렀다. 2절 노랫말을 펼친다.

고운 님 가시는 길 / 노 저어 보내놓고 / 그리운 마음이야 / 빈 배로 흔들리네 / 억년에 숨소리로 휘감기는 세월 / 억년에 물결은 여민 가슴에 / 출렁이는 사랑 / 한강은 흘러간다 / 억년에 물결은 여민 가슴에 / 출렁이는 사랑 / 한강은 흘러간다 / 한강은 흘러간다 / 한강은 흘러간다.

노랫말에 이별 서정이 눅눅하다. 나룻배에 몸을 싣고 떠나는 인연과 나루터에 남아 손을 흔드는 인걸이 밤이슬을 머금은 듯하다. 떠나고 남았다가 다시 만나고, 영원히 이별을 하는 게 인생사 아닌가. 회자정리, 거자필반, 생자필멸의 섭리가 노랫말에 대롱거린다. 노래 속 저 이별의 나루터는 필시 노들나루와 동호나루일 게다. 그 시절 그곳이 물길이 가장 얕고, 물 흐름도 가장 느린 곳이었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을 수원 화성으로 옮긴 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화성에 행차하였는데, 이때 세견선(배) 200여 척을 연결 지은 부교를 만들고 가마를 타고 건너간 곳이 노들물나루였다.

그래서 오늘 그 상공 허공중에 이별한 연인들 상봉의 오작교 같은 걸음다리를 세우자는 것이다. 영원히 타오를 감성 불길을 피워 올릴, 큰 물건 하나 지어보자. 나라가 못하거나 뒤로 미루면 기업이 깃발을 흔드시라.

이 한강을 소재로 한 노래는 노산 이은상의 시조 <고향 생각>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것이 가곡·민요·유행가를 망라하여 서단(緖端)인듯하다.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 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 만 출렁거리오~.’

뒤이은 한강 노래는 1934년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으로 박부용이 부른 신민요 <노들강변>이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여나 볼까.’ 신민요는 민요풍의 가락이지만 작사 작곡 가수의 이력이 분명한 유행가다.

한강에는 1900년 한강철교가 완공되었고, 1916년에는 인도교가 가설되었다. 2023년 기준으로 한강의 다리는 34개이다. 제1한강교는 1917년 한강대교, 제2한강교는 1965년 양화대교, 제3한강교는 1969년 한남대교다. 1970년에는 마포·잠실·영동·천호·성수대교, 1972년에는 잠실철교가 개통되었다. 1980년 성산·양화신교·원효·한강신교·반포·동작·동호대교가 개통되었다.

1990년 올림픽대교·1996년 서강대교·1998년 성수대교(재개통)·1999년 청담대교·2000년 신행주대교·신한남대교(재개통)·방화대교·2002년 가양대교·2015년까지 구리암사대교가 완공되었고, 2020년 월드컵대교가 개통되었다. 2024년 강동구 끝자락, 아리수 정수장 근처 고덕대교가 완공될 터이다. 제3한강교 이후부터는 순서를 더 붙이지 않았다. 같은 해에 여러 개의 다리가 준공되어서다.

조용필의 <한강> 노래를 마주하면 프랑스 파리 쎈 강변의 몽마르트르 언덕과 에펠탑과 미라보다리가 연상된다. 이 둘은 프랑스의 상징이고 파리의 브랜드다.

몽마르트르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유명한데, 센강 변을 낀 아베크족들의 별천지이기도 하다. 몽마르트르의 마르트르(martre)는 순교자(martyrs)에서 유래했으며, 언덕을 뜻하는 몽(Mont)과 합쳐져 순교자의 언덕을 의미한다.

해발 130m의 야트막한 언덕이지만 파리 시가지를 내다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서울의 남산(295m), 동작동현충원 뒷산인 서달봉(176m), 뚝섬 근처 매봉산(173m), 응봉산(75m)와 비슷하다. 이곳에 서면 유장한 한강 자락이 한눈에 담긴다.

몽마르트 언덕 꼭대기에 서면, 쎈 강을 오가는 유람선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가 남긴 <미라보 다리> 시가 저절로 암송된다. 기욤은 로마 출생, 아버지는 시칠리아 왕국의 퇴역장교,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출신이었다.

로마에서 출생한 그는 19세 때 파리로 나와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였으며, 1895년~1897년에 지어진 다리 난간에 서서 20세기의 명시를 남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이 시는 마리 로랑생이라는 24세 여성 화가와 아폴리네르의 이별을 읊은 노래다. 아폴리네르는 피카소(1881~1973)로부터 로랑생을 소개받았고, 생면부지의 그녀를 찾아가서 사랑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4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 1911년 루브르 미술관 다빈치 모나리자가 도난당했는데, 이때 기욤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가 풀려난다. 그들 사랑의 이별 사유다.

이후 마리 로랑생은 1914년 독일 화가와 결혼하였다가 1차 대전 후에 이혼한다. 1956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생전의 소망대로 하얀 옷에 빨간 장미를 손에 들고, 첫사랑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가슴에 얹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금잔디처럼 질긴 첫사랑이다. 한강걸음다리가 생겨나면, 이 다리에 마리 롤랑생 같은 상사화(相思花)도 피어날 텐데~.

1950년 화성시 송산면 바닷가 소금밭 집에서 조용필이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로 유학을 와서 국민배우 안성기와 같이 경동중학교 동창이 된다. 1968년 경동고를 졸업(안성기는 동성고교)하고, 1969년 컨트리웨스턴그룹 애트킨즈를 결성하여 미8군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스타반열에 올랐다.

한강 상공에 걸음다리가 세워지면, 기욤의 <미라보 다리>보다 더 애잔한 시도 지어질 것이다. 그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가요황제 조용필이 걸음다리 위에서 절창하는 모습을 연상해 보시라.

그 다리 난간, 오솔길 같은 층층길에서 환호하는 호모사피엔스, 5대양6대주에서 모여 어우러진 사람들의 환한 얼굴을 떠올려 보시라. 파란 눈, 검정 얼굴, 금빛 머리카락, 하얀 얼굴, 누른 얼굴~ 여기는 무릉도원, 지구 위에 펼쳐진 유토피아~.

 

한국유행가연구원장

문화예술교육사

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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