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덕 작가·번역가
장경덕 작가·번역가

마이클 포터의 책은 두껍다. 글은 건조하다. 다윗과 골리앗의 비유 같은 건 없다. 손자병법의 인용도 없다. 가치사슬과 경쟁전략에 관한 이론이 하나의 큰 체계를 이루고 있지만, 구체적인 기업 사례는 맛깔 나는 스토리 텔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있다. 갈증을 풀어줄 통찰과 지혜를 발견하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이다.

‘경쟁우위’에서 도전자와 맞닥뜨린 기업의 방어전략을 설명하는 장을 보자. 얼핏 보면 트루이즘에 가깝다. 공격의 가능성을 줄여라. 도전자가 볼 때 공격해봤자 효과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그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쳐라. 도전 자체의 유인을 감소시키거나 도전이 어렵게 진입장벽과 이동장벽을 높여라. 어차피 공격을 피할 수 없다면 위협이 덜한 쪽으로 유도하거나 공격 강도를 줄이게 하라. 보복은 신속하고 과감하게 하라. 도전자가 배수진을 치고 사생결단하는 상황을 만들지 마라.

포터는 이런 식으로 억제와 반격, 철수 전략을 열거한 후 방어전략의 함정을 경고하면서 마무리한다. 방어전략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단기 수익성에 집착하는 편협함이다. 지속적인 경쟁우위를 위해서는 단기적 이익을 어느 정도 희생할 필요가 있다. 공격의 유인을 떨어트리려면 가격 인하나 마케팅 공세로 의식적으로 이익률을 떨어트릴 필요도 있다. 수익률이 너무 높으면 도전자는 어떤 장벽이라도 넘으려 할 테니까. 방어전략의 두 번째 함정은 성공한 기업이 빠지기 쉬운 자기만족이다. 현실에 안주하며 도전자의 출현 가능성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다 수성에 실패한 기업은 헤아릴 수도 없다.

인간의 삶에서 자만이 실패를 부른다는 것은 태곳적부터 전해진 지혜다. 하지만 기업의 온갖 실패를 모두 그처럼 단순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늘 눈을 부릅뜨고 도전자를 경계하며 나름대로 혁신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기업은 왜 실패할까?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은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기업은 꼭 어리석은 결정을 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해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이큅먼트(DEC)를 보자. MIT 링컨 랩에서 일하던 켄 올슨(1926~2011)이 1957년 동료 할런 앤더슨과 함께 세운 이 회사는 컴퓨터 업계의 혜성이었다. DEC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미니컴퓨터 시장을 지배했다. 1964년에 DEC가 내놓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첫) 미니컴퓨터(PDP-8)는 1만8500달러였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약 2억 원쯤 되니 그리 싼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IBM의 거대한 메인프레임 컴퓨터보다는 훨씬 작고 쌌다. 인터랙티브 미니컴퓨터라는 새 시장을 창출한 DEC는 폭발적 성장을 거듭했다.

한창 잘나가던 1988년 회계연도(7월 2일 결산)의 매출은 115억 달러, 순익은 13억 달러에 이른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이 회사는 추락한다. 1992년 DEC는 139억 달러 매출에 28억 달러 가까운 적자를 낸다. 창업자 올슨은 사장 자리에서 쫓겨난다. 독자 생존에 실패한 DEC는 1998년 기업용 컴퓨터 시장을 노리던 PC 업체 컴팩에 인수된다(인수금액은 컴퓨터 업계 사상 최대인 96억 달러였다). 컴팩 역시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2002년 휴렛팩커드에 인수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DEC가 갑작스럽게 몰락한 이유를 분석한 경영이론가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 회사가 시장을 잘못 읽었다고 결론 내렸다. 물론 1980년대 후반 마이크로컴퓨터 시장이 열릴 때 DEC는 변화에 대응하는 데 너무 굼떴다. 이 회사 개발팀은 1974년에 이미 마이크로컴퓨터 시작품을 만들었으나 올슨은 더 진척시키지 않았다. 그는 1977년 또 다른 PC 개발 제안에도 퇴짜를 놓았다. 그해 올슨이 한 말은 두고두고 입길에 오르내린다. “어떤 개인이든 자기 집에 컴퓨터를 놓아둘 이유가 없다.” (훗날 올슨은 그 말을 한 건 맞는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맥락은 다르다고 밝혔다. 그는 PC가 아니라 집을 통제하는 컴퓨터를 말했다는 것이다.)

미니컴퓨터로 성공한 DEC는 분명 PC 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PC보다 훨씬 고가의 정교한 컴퓨터를 설계하고 제작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었다. 믿을 만한 캐시 카우도 있었다. 하이 엔드 시장에서 구축한 브랜드의 힘은 PC 업체들이 넘보기 어려웠다. 핵심 부품은 아무 데나 맡기지 않고 직접 설계하고 조립했다. DEC는 매출총이익률이 50%가 넘으면 좋은 사업이고 40%가 안 되면 추진할 가치가 없다고 봤다. 값싼 저성능 PC를 만들어서는 그런 수익성을 낼 수 없었다. 요컨대 적어도 당시에는 PC 시장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올슨은 자신의 성공에 취해 도전자가 다가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거나 그들이 어떤 무기와 전략을 쓸지 모른 채 넋 놓고 있다 당한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텐슨은 바로 이 지점에서 파괴적 혁신의 메커니즘을 발견한다. 그 기제는 한때 성공적인 기업이 왜 무명의 도전자에게 눈 뜨고 당하게 되는지 보여주었다.

장경덕 작가·번역가

33년간 저널리스트로서 경제와 기업을 탐사했다.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정글 경제 특강』 등을 썼고 『21세기 자본』 『좁은 회랑』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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