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예술·대중성 3박자 갖춰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 거머줘 
뉴욕타임스 “예술·오락적 쾌감 동시 충족시켜주는 가장 흥미진진한 감독”

김도산(金陶山 1891~1921). 본명 영근(永根). 서울 중구 충무로 초동 출생. 31세에 요절한 천재 영화인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Fight for Justice)’의 감독이다. ‘의리적 구토’는 전 3막 22경으로 구성된 신극좌의 연쇄극이다. 권선징악적으로 가문의 명예와 선친의 유산을 지키려는 전실 아들과 악랄한 계모 간의 암투를 그린 ‘의리적 구토’는 1919년 10월27일 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상영됐다.

일명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라고도 하는 ‘의리적 구토’는 ‘의리가 원수를 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의리의 복수’다. 단성사 사장이던 박승필이 제작·기획한 영화다.  우리의 자본(제작비 5000원)과 인력(김도산 이경환 연화 양성덕 김영덕 등 출연)으로 영화가 제작됐다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미가 크다. 입장료는 특석 1원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 3등석 40전이었다. 40전이면 당시 설렁탕 네 그릇 값이었다. 그럼에도 개봉 첫날부터 대성황을 이뤘고 20일간 상영됐다. 많은 기생들이 관람해 화제가 됐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2019년 5월25일(현지시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2회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기생충’은 지난 22일 칸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공식상영 후 8분이 넘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칸영화제 소식지 스크린 데일리는 경쟁부문 출품작 21편 중 최고 평점인 3.5점(4점 만점)을 줬다. 192개국에 판매됐다.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 양극화로 인한 계층 계급 간의 단절과 갈등을 다룬 얘기를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게 풀어낸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너무나 자랑스럽고 감격스럽다.

봉 감독은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놀라운 모험이었다. 그 작업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저와 함께해준 아티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위대한 배우들이 없었다면 한 장면도 찍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배우들께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배우 송강호는 “인내심과 슬기로움, 열정을 가르쳐주신 존경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배우께 이 영광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등이 출연한 ‘기생충’은 전원이 백수로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네 장남 기우(최우식)가 명문대 학생으로 속이고 부잣집 박사장(이선균)네 고액 과외 선생이 되면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사건을 다루는 블랙 코미디다. 전 가족이 ‘기생(寄生·더부살이)’에 성공하는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스릴러, 호러 등 다양한 장르적 장치를 아우른다. 봉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기생충’에 대해 “광대가 나오지 않는 코미디, 악당이 나오지 않는 비극”이라고 설명했다. 양극화 시대의 스토리이자 우리의 이야기다. 스토리, 전개, 영상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영화라는 평이다.

한국 영화의 100년은 참으로 길고 험난했다. 초기엔 제작비가 부족해 완성도가 낮았으나 1934년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가 큰 인기를 얻었다.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신파적 줄거리를 가진 전형적인 멜로물이었기 때문이다. 보수적 윤리관 때문에도 멜로물 제작에 어려움도 많았다. 키스신조차 담을 수 없었다. 키스신이 처음 선 보인 것은 ‘의리적 구토’이후 45년이 지난 1954년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에서 다. 배우 이향과 윤인자의 뜨거운 키스신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한형모는 장안의 파란을 일으킨 ‘자유부인(1956)’도 연출했다.

제작비가 어느 정도 확보되기 시작한 1960년 대 들어 ‘하녀(감독 김기영)’, ‘오발탄(유현목)’, ‘마부(강대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등 수작들이 쏟아졌다. 1970년대에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겨울여자(김호선)’ 등이 대중적인 흥행을 일으켰다. 1980년대에는 임권택(길소뜸), 이장호(바보선언), 배창호(고래사냥), 이두용(피막) 감독들이 작품성이 높은 영화를 만들었다. 1990년대에는 ‘남부군(정지영)’, ‘서편제(임권택)’, ‘투캅스(강우석)’, ‘접속(장윤현)’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돌풍을 일으켰다.

한국영화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부터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영화산업에 대한 3000억원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1999년 2월8일 영화진흥법이 개정돼 영화진흥위원회가 구성됐고, 2000년 영상전문투자조합 출자가 개시됐다. 영진위는 영화전문투자펀드 결성을 지원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와 2000년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등이 그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마침내 국제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칸 영화제의 경우 2002년 ‘취화선(임권택)’이 감독상을 받았고, 2004년 ‘올드보이(박찬욱)’이 심사위원 대상, 2007년 ‘밀양(이창동)’이 여우주연상(전도연), 2009년 ‘박쥐(박찬욱)’이 심사위원상, 2010년 ‘시(이창동)’가 각본상을 각각 수상했다. 그리고 2019년 봉준호의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영화가 칸에 진출한 지 35년 만의 쾌거다.

봉준호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작품성 예술성 대중성 3박자를 갖춘 ‘기생충’이 갖는 영화미학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첫째, 봉준호는 목표가 뚜렷했다. 12세부터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확고한 뜻을 세운 것이다. 일찍이 율곡 이이(李珥)의 ‘선수입지(先須立志·모름지기 먼저 뜻을 세워라)’를 실천한 셈이다. 소년시절 강한 목표의식이 성공을 낳는다.

둘째, 봉준호는 영화에 ‘몰입’하는 강도가 높다. 그는 청소년 시절 ‘영화광’이었다.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봤다. ‘비디오 대여’가 기여했다. ‘기생충’은 2013년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몰입해 구상했던 영화다. 하루아침에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몰입’에서 번뜩이는 ‘위대한 창조’가 나온다.

셋째, 봉준호는 ‘디테일의 미학’에 승부를 걸었다. 그의 별명이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사소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복선을 배치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영화는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 2001년 봉준호는 경인일보를 방문해 이 사건의 기사와 사진자료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17번이나 수정했다. 공간·소품이 디테일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항상 정교한 미장센(연극과 영화 등에서 연출가가 무대 위의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배열하는 작업)과 설정이 돋보인다. 디테일이 관객들의 공감을 배가시킨다.

넷째, 봉준호는 따뜻한 사회풍자를 구사한다. 사회심리학적 접근을 전제로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비판해 결코 튀지 않는다. 그는 사회심리학이 강한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이다. 대학 시절 만든 단편영화 ‘백색인’, ‘지리멸렬’, ‘프레임 속의 기억들’이 이를 말해준다. ‘기생충’은 사회풍자, 사회비판의 백미다.

다섯째, 봉준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쓴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 등의 연출과 각본을 맡았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은 소설가인 외조부 박태원의 DNA를 이어받았다. 예술성은 그래픽디자이너 봉상균 교수의 DNA를 물려받았다.

뉴욕타임스는 봉준호를 이렇게 평가한다.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선봉장, 봉준호의 영화를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를 볼 수 있고 역사도 돌이켜 볼 수 있다. 현실(Reality)과 환상(Fantasy)을 결합해 영화의 예술적 쾌감과 오락적 쾌감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그의 작품들은 늘 기대와 호기심을 안겨 준다. 가장 흥미진진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5위권의 한국영화는 ‘기생충’을 계기로 정상에 우뚝 섰다. 100년의 한국영화는 ‘기생충’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조한규 중소기업신문회장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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