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시장 재선거에서 야당 후보 또다시 승리
에르도안 친이슬람 정책 급제동…세속주의 요구 거셀 듯

레제프 타이이르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터키의 친 이슬람 정책에 제동이 걸렸다. 이에 따라 향후 터키인들의 정치적 선택이 큰 관심사다.

지난 23일(현지시간) 치러진 터키 이스탄불 시장 재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에르도안 정권의 2인자인 정의개발당(AKP) 후보 비날리 이을드름 전 총리를 누르고 당선됐다. 야당 후보인 에크램 이마모을루의 득표율은 54.03%로, 득표 차이는 9%포인트다.

이미 지난 3월말 치러진 원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0.2%포인트로 앞섰지만 에르도안이 선거 무효를 주장하는 바람에 3개월 만에 다시 치러진 재선거에서 오히려 격차가 더 벌어진 것이다.

이 선거 결과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스탄불이 터키 최대의 도시이자 에르도안의 정치적 고향으로, 20여년 동안 권력을 쌓은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패배했기 때문이다.

에로도안은 1994년 이스탄불에서 시장으로 당선된 후 총리를 3차례 연임한 뒤 대통령이 됐고, 이후 정치 체제를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꿔 1인자로서의 권력을 놓지 않고 있다.

에르도안은 권력을 쥔 뒤 끊임없이 친 이슬람 정책을 실시하며 권력을 강화해왔다. 이슬람권 국가로 알려진 터키에서 친 이슬람 정책을 실시하는 게 이상할 게 뭐냐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터키라는 나라의 건국 과정과 건국 이후의 정책 방향을 살펴보면 에르도안의 정책이 오히려 건국이념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 주역은 전신인 오스만제국의 군 장성이었던 무스타파 케말이다. 우리에게는 케말 파샤로 알려진 인물인데, 그는 오스만제국이 독일과 함께 동맹국으로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들의 식민 지배를 받을 위기에 처하자 터키인들을 결속시켜 1923년 터키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독립을 이룬 영웅이다.

건국 후 그는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헌사 받았는데, 아타튀르크는 ‘투르크인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만큼 터키인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는 인물로, 지금도 터키 곳곳에서는 그의 동상과 초상화를 만날 수 있다.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를 건국하면서 철저한 세속주의 정책을 택했다. 정치에서 종교, 즉 이슬람의 이념을 철저히 배격한 것이다. 그 이유는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오스만제국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오스만 황실이 보여준 우유부단함과 유약한 모습에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스만 황실은 동유럽은 물론,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이슬람권 전역의 정치, 종교적 통치자였다. 그러나 황실은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대제국 통치자로서의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허수아비 노릇에 충실했다. 결국 케말은 다른 모든 통치지역을 잃더라도 투르크인들만큼은 식민 지배를 받을 수 없다며 전쟁을 통해 새 나라 터키를 건국했다.

그는 터키 건국 이후 오스만 황실은 물론, 이슬람의 종교 수장인 칼리프직마저 폐지하고 철저하게 세속주의 정책을 택했다. 그의 세속주의 정책은 단순히 정치에서 종교를 배척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구시대의 모든 법률과 전통을 폐기하고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포함한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수립하는 데 까지 이어졌다. 정치·법률·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그의 세속주의 정책을 터키인들은 ‘케말리즘’이라고 부르는데, 케말이 사망한 1938년 이후에도 케말리즘은 개혁적 이미지를 지닌 채 이어졌다.

케말리즘의 가장 큰 지지 기반은 케말의 직속 후계자들인 군부다. 군부는 이슬람에 우호적인 법안이 탄생해 세속주의를 훼손한 1960년 처음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몰아냈다. 케말리즘을 수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군부는 1971년과 1980년, 1988년에도 케말의 건국이념과 다른 정책을 펴던 정권을 교체시켰다.

터키 군부가 단지 세속주의 정책의 일관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쿠데타 이후 처리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정권을 탈취해 영구 집권이나 독재를 일삼는 다른 나라의 쿠데타 세력과는 달리 이들은 쿠데타 이후 새로 세운 정권이 안정되면 정치권력을 민간에 맡기고 다시 군으로 돌아간 것이다.

대개의 경우 ‘군부’, ‘쿠데타’ 등의 용어는 수구, 또는 독재의 이미지와 겹치지만 터키에서만큼은 개혁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는 케말리즘을 존중하는 터키 군부의 독특한 입지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탄불을 기반으로 등장한 에르도안은 권력을 거머쥐는 과정에서 점차 공포 정치를 통해 세속주의를 버리고 친 이슬람 정책을 펴며 독재 권력을 강화했다.

이슬람의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은 지도자의 독재 권력 또한 불가피한 것으로 본다. 에르도안은 이를 이용해 세속주의 세력에 대한 척결을 넘어 터키 공화국을 정교가 일치된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원리주의 체제로 변화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그가 친 이슬람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인 무슬림들에게 어필해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철저하게 감추고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적지만 그동안의 권력을 토대로 그의 일가가 소유한 재산은 수십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추악한 독재자의 모습이다.

결국 터키 군부는 지난 2016년 역시 세속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5번째 쿠데타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케말리즘을 지키려는 군부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에르도안이 군부에 대한 숙청작업을 꾸준히 단행하며 충분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케말리즘을 지키고자 하는 세속주의 세력의 다툼에서 처음으로 세속주의 세력이 패배한 것이었기에 이후 에르도안은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민주 시민들의 힘이었다. 이번엔 군이 아닌 이스탄불 시민들이 그와의 오랜 인연을 끊고 반기를 든 것이다. 터키에서는 독재자에 저항하는 민주 시민들의 처음이자 작은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과연 ‘케말리즘’은 시민들의 힘에 의해 부활할 것인가. 케말리즘 지우기에 나선 에르도안과 터키 민주 시민들의 승부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우리가 독재자에게 승리했듯, 그들도 그러길 바란다.

곽영완 국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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