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전통적 예술 개념은 설자리가 없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비예술인가를 나누는 기준 자체가 불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터널 속의 검댕, 곰팡이, 콘크리트 균열, 길거리의 돌멩이도 화가에 의해 예술 작품으로 탄생한다. 상황과 맥락에 의해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쓰레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예술인가’는 더 이상 예술가들에게는 질문이 아니다. ‘색’과 ‘빛’이 차지하는 비중도 그리 크지 않다. 그냥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끼면 된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은 바로 그 작품에 ‘미(美)’가 있기 때문.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통해 기쁨과 환희, 절망과 분노를 느껴도 되고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껴도 된다.

요즘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는 배종헌의 ‘미장제색(美匠霽色)’, 허구영의 ‘여전히 나에게 뜨거운 이미지 중 하나’의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다. 

배종헌의 ‘미장제색’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연상시킨다. 시멘트 칠을 하는 미장이의 ‘미장’에 산을 붙인 ‘미장산’에는 비온 뒤 맑게 갠 인왕산처럼 계곡도 있고 나무도 있고 길도다. 어두운 아름다움이다. 부제인 ‘어느 반 지하 생활자의 산수유람’그대로다. 그는 “일상의 경험을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시키는 것에 관심을 두고, 무용하고 소멸의 위기에 처한 사물과 도구를 재해석해왔다”고 한다.

허구영의 ‘여전히 나에게 뜨거운 이미지 중 하나’는 개념미술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완성이 아닌 아이디어와 과정을 보여준다. 동시에 회화·설치·영상·텍스트 월드로잉 등이 서로에게 관여하며 다양한 재료와 형식을 변주한다. 영국의 대지미술가 앤디 골드워시(Andy Goldsworthy)를 위한 오마주(hommage) ‘깨진 돌에 금박’이란 돌멩이 작품이 눈에 띈다. 그는 “작품의 장르화, 대상의 타자화에 대한 경계심을 근간으로 매체간의 전이, 전환, 간섭이 발생시키는 감각과 개념의 다층적 관계를 탐색해왔다”고 한다.

적산(寂山‧속명 김승익) 스님의 ‘선화(禪畵)’전시회도 12월 25일부터 31일까지 녣세계최?? 세계최대의 달항아리 3003위 대 아라한을 품다’라는 주제로 서울 인사동 ‘겔러리 밈’에서 개최된다. 작가노트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달(月)은 수월(水月)이요, 항아리도 곧 달이다. 그 안에 3003위 대 아라한이 중생계를 그윽이 내려다본다. 바야흐로 중생을 제도할 원력으로 말이다. 달이 곧 아라한이요, 아라한이 곧 달이다. 3003위의 그 많은 아라한 중에 그대를 애틋이 주시하는 존자님이 계시다.”

스님이 ‘선화’의 문을 열기까지는 스토리가 있다. 독일의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의 ‘프로타주(frottage)’와 심리학자 이경남의 ‘비움 아트’와 유사하다. 에른스트는 어느 날 폭우로 해안가 여관에 갇혀 있었다.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방바닥을 보고 있었다. 이른바 ‘멍 때리기’. 그러다 불현듯 영감을 얻었다. 우툴두툴한 나무 방바닥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그 위를 문질렀다. 그러자 서로 들어맞지 않은 상(像)들로 이뤄진 무늬가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프로타주’는 탄생했다. 

이경남도 어느 날 무료해서 종이에 가위질을 했다. 그러자 점차 몰입이 됐다. 종이에서 잘려진 부분을 버렸다. 텅 빈 공간이 다양한 무늬로 나타났다. 페르시아 카페트 문양, 아프리카 흑인 추장이 걸치고 있는 천의 문양, 인디안 모자 문양, 한국의 전통문양 등 다양한 문양이 텅 빈 공간에 ‘형상이 없는 형상’으로 나타났다. ‘비움 아트’의 시작이었다. 

적산 스님은 지난 15년 전 어느 날 북한산 노적사 인근 소나무 아래서 선정(禪定) 중 극락세계 도솔천 길목에서 무지개가 핀 하늘 아래 오색구름을 탄 수많은 아라한(Arhat, 阿羅漢)들을 친견했다. 아라한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최고 경지에 오른 성자를 일컫는다. 아라한은 석가모니의 열반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이 세상에 남아 정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위임받은 존자다. 아라한의 준말은 나한(羅漢). 깨달음을 얻었지만 부처님이 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 대승불교는 보살이라 칭하고, 초기불교에서는 나한으로 일컬었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나한전이 있다. 

선정에서 깨어나 보니 스님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10년 간 스님은 도솔천에서 친견했던 수많은 아라한들을 화폭에 담았다. 도솔천의 아라한을 세간으로 모셔온 셈이다. '3000'은 우주를 뜻하는 불교의 3천대천세계를 의미하며 '3'은 불·법·승 3보를 의미한다. 

▲ 적산 스님의 ‘일원상 대 환희송(一圓相 大 歡喜松)’이라는 소나무 그림. 이 소나무 아래서 스님은 ‘화도선’을 깨달았다고 한다.

1991년 해인사 원각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던 스님은 원래 선승이었다. 화두만을 붙들고 동정일여(動靜一如)·몽중일여(夢中一如)·숙면일여(熟眠一如)의 나날을 보내다가 홀연 붓을 들었다. 선정에 든 채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른바 ‘화도선(畵道禪)’이다. 그림을 통해 도(道)를 표현하는 일도 한 방편이라는 생각으로 길 없는 길을 떠났던 것이다. 사실 화두를 들고 좌선을 통해 식심견성(識心見性)을 추구하는 간화선만이 부처가 되는 길은 아니다.

염불·사경·독경·기도·절 등도 수행의 방법이다. 적산 스님의 ‘화=도=선’이란 수행법도 얼마든지 깨달음의 훌륭한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림을 통해 삼매에 들면 된다. 일심(一心)의 ‘선화’가 바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3003위 아라한을 달항아리에 원화 그대로 새긴 작품들이 선보인다. 3003위 아라한을 그린 작품은 2014년 7월에 전시된 바 있다. 이밖에 산수화, 일원상 대 환희송, 동서양 문양과 서예의 만남이란 주제로 조성한 작품 등이 전시된다. 길 없는 길, 예술 아닌 예술의 세계가 기다린다.

조한규 중소기업신문회장·정치학박사

저작권자 © 중소기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