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문 이어지며 권위 떨어져…왕실 역할 축소 불가피

영국인들 사이에서 왕실을 폐지하자는 의견이 또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이번에도 도화선은 왕실 인사의 부적절한 태도다. 주인공은 왕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해리 왕손과 메건 마클 왕손비 부부다. 이들은 최근 왕실의 구성원 역할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가족회의를 연 뒤 이들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 왕손 부부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를 두고 영국 언론들은 브렉시트에 빗대 ‘메건 마클 왕손비의 왕실 독립선언’을 뜻하는 메그시트(Megxit)라며 왕실의 분란을 이슈화하고 있다.

해리 왕손 부부가 독립을 선언한 이유는 마클 왕손비에 대한 영국 보수 신문들의 지속적인 공격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클 왕손비는 아프리카계 혼혈 미국인으로, 해리 왕손과 결혼 당시 두 살 연상에 이혼 경력까지 있어 화제가 됐고 이는 언론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따라서 왕손 부부의 독립 선언은 아예 영국을 떠나겠다는 의도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해리 왕손 부부는 독립을 선언한 뒤 영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생활하고 자선단체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를 실행할 돈인데, 이 때문에 또 다른 논란이 생겼다. 해리 왕손 부부가 왕실을 배경으로 돈을 만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 호칭이 ‘서섹스 공작 부부’인 이들은 ‘서섹스 로열’이라는 브랜드로 생활용품을 판매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지만, 여론이 악화된 상태에서 생활용품이 제대로 판매될 리 없다. 이 때문에 이들이 실제로 노리는 돈은 아마도 왕실에 지급되는 정부의 지원금이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영국 정부가 왕실에 지급한 지원금은 8220만파운드(약 1230억원)였다. 여왕이 소유한 부동산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의 4배에 달하는 액수다. 해리 왕손 부부가 노리는 돈도 이 정부 지원금의 일부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안 그래도 왕실을 지탱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에 불만이 많은 일부 여론을 감안할 때 이는 부적절한 태도임이 분명하다.

여론도 악화일로에 있다. 일부에서는 왕실의 존재 이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1997년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 다이애나비가 교통사고로 숨질 당시 왕실이 연루됐다는 의혹과 함께 등장했던 왕실 폐지론이 다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영국을 포함해 왕실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많지만 오늘날 일부 국가의 왕실들은 권위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아 간혹 폐지론이 튀어나오곤 했다. 영국만 해도 언론의 가십성 기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왕실 인사들이다. 왕실을 없애지 않는 이유가 가십과 조롱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영국 왕실이지만 역사적으로 왕실 자체의 역할만 놓고 본다면 대체로 주역보다는 조역에 불과했다. 역사의 큰 고비마다 영국을 움직인 건 왕실이 아니라 의회와 수상이었다.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의회가 발달해 수상 중심으로 국력을 키워나갔다.

왕이 유명무실해진 건 1215년 마그나카르타(대헌장)에 서명한 존 왕 때부터다. 프랑스에서 잃은 땅을 찾기 위한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세금을 올린 왕에 대항해 귀족들이 자신의 권리를 확인 받기 위해 작성한 일종의 평화 협정 문서로, 왕의 권위가 무너진 첫 사례로 기록된다.

16세기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에는 프랑스나 스페인 등 외부와 전쟁을 치르느라 왕권이 강화되기도 했지만, 17세기 중반 청교도혁명 당시에는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되기도 했다.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당시 이뤄진 루이 16세 처형보다 백수십년이나 앞선 것이다. 물론 청교도혁명을 통해 집권한 크롬웰의 독재에 실망한 국민이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다시 왕으로 세우는 왕정복귀를 단행하지만 왕실에 대한 신뢰는 크게 손상됐다.

이후에도 왕실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서 대영제국을 건설할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에서는 당시 왕실을 이끈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시대’라고 기록하며 추앙하지만, 그 시기를 실제로 이끈 건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라는 두 명의 수상이었다.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을 이끈 이들은 선의의 경쟁을 통해 양당 체제의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해 영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을 상징하는 격언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였다. 나라를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한 발 물러서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나라가 발전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당에 해리 왕손 부부의 독립 선언을 통해 다시 불거진 영국 왕실의 추문이 왕실 폐지론으로까지 이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시대적 여망인지도 모른다. 영국 왕실의 폐지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인지 와는 별도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왕실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역할 축소는 불가피해 보인다. 차제에 왕실은 없더라도 봉건적인 구습에 얽매여 있던 나라라면 거기서 벗어날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곽영완 국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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