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데믹이 반복되는 시대, 글로벌 의약품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2024 글로벌 바이오 컨퍼런스(GBC 2024) 마지막 날 열린 '혈액제제 및 백신 접근성 포럼'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전문가들의 지견을 공유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특히 국가별 소득 수준에 따라 수급 상황이 크게 다른 혈액제제의 경우 환자들의 접근성 확대를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6일 열린 포럼에서 첫 연사로 나선 유윤 마리우닝시 세계보건기구(WHO) 혈액제제팀장(Team Lead of Blood and Other Products of Human Origin)은 '혈액제제 접근성 확대를 위한 글로벌 동향 및 개발 현황'을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혈액제제란 인간의 혈액 성분을 활용해 개발한 생물학적 제제 계열 의약품이다. 면역글로불린이나 알부민 등이 이에 해당한다.
혈액제제의 특성상 원료 수급은 전량 헌혈에 의존해야 한다. WHO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혈액 수급량의 약 98.7%가 무상 헌혈로 확보된다. 유윤 팀장은 "아직까지도 유상 헌혈이 일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WHO는 무상 헌혈을 적극 권고하며 100%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혈액제제는 전혈 등을 통해 확보한 혈장을 활용해 생산하는데 관련 규정이나 관리감독이 충분하지 않은 일부 국가에서는 혈장을 수급해도 많은 양이 폐지되는 경우도 있다.
유윤 팀장은 "안전한 혈장을 활용해 치료제를 생산하는 건 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며 "WHO가 혈장분획제제를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이유도 이와 같고 따라서 각국 정부에서 혈액제제의 품질과 안정성·가격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혈액제제는 국가필수의약품으로 분류돼 관리하고 있다.
WHO가 혈액제제의 수급 현황과 사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모니터링하는 부분은 없지만 북미에서는 미국이 99% 수준의 혈장을 공급하고 있다. 아태지역에서는 75%의 혈장이 중국에서 확보된다. 지난 2019년을 기준으로 하면 전 세계에서 수급된 혈장은 6800만L에 달했다.
또한 이번 발표에 따르면 많은 혈액제제 공장이 아시아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권역별 혈액제제 생산 공장은 아시아권 39개와 유럽 21개에 이어 북미 9개·남미 3개 등으로 집계됐다. 반면 중동과 아프리카는 전체 권역에 자리잡은 공장이 4개에 불과했다. 지역에 따라 혈액제제의 자체 생산 정도가 크게 다른 것이다.
유윤 팀장은 "면역글로불린은 45%가 북미에서 소비되고 26%가 유럽·20%가 아태에서 쓰인다"며 "반대로 알부민은 50%가 아태에서 사용되고 20%가 북미·17%는 유럽에서 소비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장의 임상적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혈장이 더 많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최소한 130명이 혈장을 기부해야 면역글로불린 등을 필요로 하는 환자 한 명을 치료할 수 있다. 또한 인구의 고령화와 비만 인구 증가로 인한 간질환 인구 증가·신규 바이러스의 등장 같은 요소도 혈액제제 사용률을 증가시키는 이유 중 하나다.
유윤 팀장은 국가의 소득수준에 따라 혈액제제의 수요도 달라진다는 점을 주요하게 지적했다. 가령 국가소득이 높은 국가에서는 알부민과 면역글로불린 등의 수요가 다양하게 높은 반면 가장 기본적인 8인자나 9인자 응고제제의 수요는 높지 않다. 약가가 높아도 보다 고품질의 차세대 치료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액제제는 기본적으로 가격이 높아 국가소득이 낮은 국가에서는 실질적으로 환자들이 사용하기 어렵다. 또한 코로나19 이후 헌혈자 감소로 인해 혈장 수급 비용이 계속해서 올라가는 만큼 저소득 국가 환자의 의약품 접근성은 더욱 저해될 가능성이 높다.
혈액제제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려면 개별 국가에서도 혈액제제 관련 시스템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WHO의 정책 방향이다. 원활한 상업적 공급이 담보돼야 환자들에게 양질의 의약품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윤 팀장은 "혈액은행이나 혈액원 등이 GMP 기준을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이는 혈장의 품질을 담보하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라고 부연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혈액제제 공급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확보하고 자체적으로 생산과 공급이 가능한 현지 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대규모 시설이 아니더라도 자체 생산 시설을 우선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WHO는 통상 한 국가가 확보한 혈장이 30만L 수준이면 국내에서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한다. 반면 보유량이 2만L 미만으로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도 있다. 유윤 팀장은 "혈액제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의약품 시판 시 기준과 품질 안전성을 철저히 관리해야 하고 기준에 미달하거나 위조된 의약품에 대한 조치도 명확해야 한다"며 "전체 공급망의 품질 향상에 기여할 수 있도록 시장감시와 모니터링·지나친 홍보나 광고 통제도 필요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를 위해서는 부작용을 조사하고 관리하는 등의 약물감시체계도 확실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WHO는 헌혈을 통한 혈장 확보를 강조하고 지역 사회를 대상으로 한 홍보와 정기적인 헌혈자 확보를 통해 일종의 지역별 네트워크를 수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유윤 팀장은 여러 차례 접근성 확대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헌혈이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혈자 감소는 세계적인 문제인 만큼 국가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홍보와 지원도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또한 유사한 안전·품질 기준을 갖춘 국가라면 혈액제제의 이동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유윤 팀장은 국가별로 알부민이나 면역글로불린·혈액응고인자 등 혈액제제의 세부 수요가 다른 만큼 국가간 조율도 필요할 수 있다고 전했다. 국가별 수요에 맞춰 혈액제제의 이동이 이뤄지려면 일정 수준의 품질 기준을 인접국에서 모두 충족해야 한다. 이는 관련 지침이 충분하지 않은 국가의 경우 공적인 관리감독 시스템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