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광복(光復)을 맞은 후 7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미국은 한국의 정치적인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가 보여주듯이 한국이 선택한 민주주의, 시장경제는 북한이 채택한 공산주의 계획경제에 비해서 체제 면에서 월등한 비교우위를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의 제도나 문물을 많이 참고하였다. 아쉬운 것은 다른 나라들, 특히 유럽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독일의 경우를 눈 여겨 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기를 들면 독일은 재정의 건전성을 특히 중요시하여 정부의 재정적자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또한 개인의 경우에도 빚(Schuld)을 지는 것은 죄(guilt)를 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국민 일반에게 널리 확산되어 있다.
2020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약 2000조원이었다. 그런데 민간부채는 약 4000조원으로 GDP의 2배에 달했다. 민간부채 4000조원은 가계부채 2000조원과 기업부채 2000조원을 더한 것이다. 즉, 가계와 기업이 모두 빚더미 위에 앉아 있다.
정부채무에 연금충당부채까지 더한 국가부채도 2020년 현재 약 2000조원으로 3대 경제주체인 가계, 기업, 정부가 모두 각각 2000조원씩의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어서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IMF) 사태 같은 위기가 다시 일어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선, 후진국의 주요한 차이점은 불확실한 미래에 미리미리 대비(providence)하는 것, 즉 유비무환,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자세가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하였다.
자본주의 경제는 항상 호경기와 불경기의 단기적인 경기순환이 발생하며, 장기적으로는 공황 등 큰 충격이 닥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국처럼 가계, 기업, 정부 부문이 모두 과도한 부채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이러한 장·단기의 충격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라는 근검(勤儉)의 두 자(字)를 적어 보내면서, 내가 비록 남겨 줄 유산은 없으나 이를 실천에 옮기면 큰 재산보다 오히려 더 이로울 수가 있다고 하였다. 미국처럼 소비를 증대시켜서 단기적으로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것에 최우선순위를 두는 것보다, 독일처럼 건전한 소비생활을 장려함으로서 장기적으로 국민경제 전체가 튼튼한 기반 위에 서도록 인도하는 것이 건실한 경제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창영 연세대 명예교수·15대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