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들의 자금조달에도 비상이 걸렸다. 금리인하 기조에 모처럼 연말 '훈풍'이 불던 회사채 시장이 비상계엄 사태 이후 탄핵 정국이 지속되며 투자심리가 얼어 붙으면서다.
특히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비우량채를 발행하는 기업들의 우려가 높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금리를 높이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또 트럼프발 리스크에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확대되며 한국 증시를 빠져나가는 자본에 IPO 시장도 멈춰서고 있다. 연내 IPO를 준비하던 기업들은 상장 일정을 내년으로 미뤘다. 가뜩이나 신규 상장 기업들의 주가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증시에서의 자본 이탈은 일부 대어급을 제외하고는 수요예측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11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비상계엄 선포 이후인 지난 4일부터 10일까지의 회사채 발행액은 6701억원, 상환액은 9621억원으로 순상환 2920억원으로 집계됐다. 3일까지 순발행을 기록하던 회사채 시장이 계엄 이후 급격히 위축된 모양새다.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기조가 반영된 10~11월 두 달간의 순발행액은 1조 6177억원에 달했다.
올해 상반기 회사채는 65조 2884억원이 발행됐고, 상환액을 제외한 순발행 규모는 11조원 수준이다. 1분기 순발행이 급증했다가 2분기에는 순상환으로 전환됐다. 금리인하 분위기가 조성되던 3분기에는 순발행 1054억원을 기록했고, 10월 이후 회사채 시장은 활황을 맞았다.
통상 연말에는 회계연도 장부 마감(북클로징) 시기로 회사채 시장 비수기지만, 한국은행이 10월과 11월 두 달 연속 금리인하를 단행하며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이 이어졌다. 특히 계엄 직전인 11월부터 12월 3일까지는 4조 1024억원의 회사채가 순발행되며 폭발적 수요를 이어갔다.
하지만 3일 밤 비상계엄 선포 이후 투자심리가 급격히 위축되며 회사채 시장은 순상환으로 돌아섰고, 신규 회사채 발행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계엄 이후인 12월 4일과 6일, 효성화학과 ABL생명이 각각 300억원, 1000억원의 회사채 발행 수요예측에 나섰지만 단 한 건의 주문도 없이 전액 미매각됐다. 지난 5일 JB금융지주가 발행한 1300억원 규모의 회사채는 1230억원만 모집됐다.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비우량채의 경우 조달금리가 더욱 올라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지난 3~4월 4%대에 머물렀던 건설사들의 회사채 금리는 부동산 업황 침체까지 겹치며 최근엔 7~8%대까지 올라왔다. 국고채 금리가 연중 최저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투자심리가 안전자산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회사채 시장에서도 양극화 현상은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일 신용등듭 AA+(긍정적)의 한화생명은 4000억원 규모의 후순위채 수요예측에서 총 1조 40억원의 주문을 받았다. 금리 밴드는 연 4.00~4.50%로 한화생명은 발행 규모를 늘려 금리 4.45%에 8000억원을 발행할 전망이다. 앞서 미매각이 발생한 효성화학의 경우 신용등급은 BB+(부정적)수준이다.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대규모 공사채 발행도 회사채 시장에는 부담이다. 시장의 자금이 공사채로 쏠리며 일반 기업들의 수요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전력은 지난 3일 총 7000억원 규모의 한전채를 발행했는데 금리는 2년물 2.9000%, 3년물 2.868%, 5년물 2.919%로 나타났다.
김명실 iM증권 연구원은 "올해 말과 내년 크레딧 시장의 주요 변수 중 하나는 단연 공사채 발행"이라며 "공사채 발행량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초우량물이 수급을 모두 가져가면서 타 채권이 약세를 보이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본시장 위축으로 IPO를 계획중인 기업들도 줄줄이 일정을 연기하고 있다. 연내 상장이 목표였던 반도체 포토레지스트 소재 기업 삼양엔씨컴과 온라인 교육 플랫폼 데이원컴퍼니, 자동차용 변압기 업체 모티브링크가 상장 일정을 내년으로 미뤘다. 시가총액 5조원 수준으로 평가받는 DN솔루션즈는 증권신고서 제출 일정을 확정하지 못했다.
계엄 이전인 10~11월에도 케이뱅크, 동방메디컬, 미트박스글로벌, 씨케이솔루션, 오름테라퓨틱 등 대어급을 포함한 5개 기업이 IPO 시장 부진에 증권신고서 제출을 철회했다. 계엄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트럼프발 강달러로 국내 자금 이탈이 가속화되면서 이들의 재상장 일정은 더욱 불투명해 졌다.
한편, 내년 회사채 순발행 수요는 올해보다 적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국내 제조업의 대규모 비투자가 막바지 단계고, 기업들의 현금 흐름 개선세가 전망되면서다.
정연홍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신규 투자 수요가 제한되는 한편 내년 하반기부터 경기회복 국면에 접어들어 기업들의 연간 잉여현금흐름이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높아진 현금 여력은 기업들의 사채발행 수요를 낮추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