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송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대표
현의송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대표

필자는 청춘을 농협에서 보냈다. 1965년 입사해서 농촌지도, 경제사업, 신용사업 등 다양한 일을 지방과 서울을 오가면서 40년을 근무하고 2005년 퇴임했다. 한 직장에서 40년을 보낸 시간을 돌이켜 보면 명예스럽다기 보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뭘까. 농민들이 잘 살기는 커녕 수입개방 등으로 홀대받는 농촌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40년 동안 무엇을 했길래. 되돌아보면 월급을 받고 내 자신의 영달만 생각하고 살아왔던 삶이 아니었나 하고 자책하고 있으면 얼굴이 화끈 거린다.

퇴임 후 2모작 인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일본 슈도(修道)대학 히구마(日揋) 교수를 만나게 됐다. 히구마 교수는 전라남도 영암군과 강진군 등 한반도의 서남부 쪽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농촌지역 연구에 관심이 깊었다. 자연히 필자와 한국농촌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농촌을 비교 연구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히구마 교수는 여름방학 때 일본대학생들과 함께 한국농촌을 방문해 조사도 하고 노인복지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인연이 된 히구마 교수는 2005년 어느 날 필자에게 일본의 농업 농촌 문화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지 않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필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히로시마에 있는 슈도대학의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히로시마에 가서 1년간 연구원생활을 하겠다고 했다. 그해 8월 말 아내와 함께 히로시마에 도착해 히구마 교수의 특별한 배려로 객원연구원생활이 시작 됐다.

객원연구원이 된 필자는 슈도대학의 재학생과 졸업생 등 10여명의 히구마 세미나 팀과 함께 히로시마 북부와 광산지역 등 농산촌 지역을 견학하고 히구마 교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히로시마에 있는 동안 일본 농촌지역 30여 곳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 농촌방문 기록을 광주일보에 연재한 적도 있다. 시마네(島根)현의 농촌에서는 학생 운동했던 지도자들이 폐허화되어가는 농촌을 일으키기 위해 유기농업단지를 만들고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직러래장터를 운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2007년에는 히구마 교수의 제안으로 NPO법인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과 일본의 농업과 농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다. 수차례 걸쳐 토론회를 열고 심포지엄도 개최했다. NPO법인은 한국과 일본의 농업 농촌 문제 뿐만아니라 양국의 우호증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8년 여름방학 때는 슈도대학 학생 10여명과 필자의 고향마을을 방문해 주민의 복지 현황과 노인들의 의식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히구마 교수와 학생들은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고 라면을 먹으면서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히구마 교수의 농촌에 대한 강한 교육자의 신념을 느낄 수 있어 오래 기억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인접 국가이므로 역사적으로 주고받는 관계가 무척 많다. 한국에는 이웃사촌(四寸)이라는 말도 있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이 사촌(四寸)이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 된다. 국가 간에도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히구마 교수는 대학의 학장을 맡으라는 설립자의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사절했다고 한다. 학교 경영에 전념하다보면 교수의 본업인 연구를 소흘히 할 수 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학장의 지위보다 평교수로 연구업적을 남기는 것이 더 보람 있는 일이라는 히구마 교수의 설명이다.

1차 산업인 농업과 농촌의 문제는 지구촌 환경문제와 함께 모든 인류의 공통의 과제인 것 같다. 학문과 이론보다는 현장에서 답을 찾기 위해 행정과 학자, 주민이 나서는 모습을 일본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히구마 교수는 대학에서 강의보다는 농촌의 현장을 방문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농촌현장에서 농촌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그 해답도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히구마교수 뿐만 아니라, 자주 만났던 일촌일품운동의 전문가인 동경대학의 이마무라나오미(今村奈良臣)교수와 와세다대학의 가키자키(柿崎)교수, 법정대학의 고마쓰고이치(小松光一)교수도 각각 지방에 연수시설인 숙(塾)을 갖고 운영한다. 가키자키 교수는 갓쇼쓰쿠리의 고장으로 유명한 산촌 지방자치단체의 교육장도 맡고 있었다. 숙은 학교교육의 연장선에서 농촌현장의 청년들을 지도하는 비정기 사설연수원이다.

어느 날 이마무라 교수의 농촌청년 교육장에 참석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동경 같은 도시에는 문화라는 것이 없다. 농촌지역에는 몇백년 계속 이어오면서 지역을 발전시키고 활기찬 전통예능 전통문화가 있다. 가슴을 쭉 펴고 자신 있게 전통예능과 전통문화를 후손에게 여러분이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역할을 요즘 농협에서 하는 농산물직매장이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도 가키자키교수와 고마쓰 교수의 농촌숙에 참석해서 한국농업과 농촌을 알리는 강의를 한 적이 있다.

2007년 어느 날 필자는 히구마 교수 일행과 전남 진도군을 함께 방문했다. 고등학교 후배인 박문화원장의 안내를 받아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일본인들의 무명의 집단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현장을 방문했다. 이 무덤은 일본인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의미로 <왜덕산 矮德山>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이때 방문을 계기로 매년 8월에는 슈도대학생과 이마바리(今治)의 구루시마(來島.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군장수)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왜덕산을 참배하는 행사를 하게 됐다. 왜덕산 관련 한국과 일본의 언론보도도 자주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전라남도가 주관하는 명량해전 기념행사에 매년 구루시마(來島)기념사업회의 회원들이 다수 참석하고 있다.

농촌현장에 농업의 문제도 있고 해답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 일본교수들의 일반적인 직업관이다. 그래서 일본의 교수와 학자들은 살아있는 학문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의송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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