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평오 한국해양대학교 석좌교수·전 KOTRA 사장·전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
권평오 한국해양대학교 석좌교수·전 KOTRA 사장·전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

1970년대 후반 대학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1학년 때 영어 외의 제2외국어 하나를 선택과목으로 정하게 돼 있었는데,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 스페인어였다. 우선 처음 접해보는 외국어인데다 할 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거리에서 ‘부에노스 디아스’(Good morning), ‘무챠스 그라시아스’(Thank you very much)하고 한 두 마디 하면 왠지 유식해 보일거란 착각이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수출제일주의를 외치던 당시에 중남미가 가장 유망한 미개척 시장으로 여겨져서 스페인어를 할 줄 알면 성공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랬던 중남미가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유망시장으로 남아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중남미하면 뭐가 맨 먼저 떠오르는지 물으면 대개는 ‘마약, 깽, 게으르다, 못 산다’ 등 부정적 이미지를 말한다. 조금 더 중남미를 아는 사람들은 ‘축구, 쌈바, 인디오’ 등 사실에 근거한 이미지를 추가하고, 비즈니스나 관광 목적으로 그곳에 가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구동성으로 ‘가는 데만 서른 시간이 넘어 걸리는 지긋지긋하게 먼 나라’로 얘기한다. 중남미에 대한 이런 인식이 상당부분 맞지만 너무 추상적인 차원에 그치고 중남미가 갖는 특징과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중남미 시장 특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장잠재력이 크지만 동시에 불안요소도 많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곳’이다. 먼저 긍정적 측면에서 인구는 6.5억 명으로 아세안과 비슷하지만, GDP는 5.2조$로 아세안의 1.7배 규모를 가진 거대시장이다. 과거 유럽의 식민지배 때문에 언어 문화 심리적으로 비슷해서 단일 시장으로서의 통합마케팅이 가능하고, 우리나라와 FTA를 체결한 나라가 많아 지리적으로는 멀지만 경제교류를 키울 수 있는 기반도 잘 갖춰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은 정권교체로 인한 고질적인 사회 불안, 정부재정 악화와 경제침체는 이 지역의 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 요인이기도 하다. 중남미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2014~2019 기간 중 0.3%에 불과해 1930년대 세계대공황기의 1.3%보다 낮았고, 2020년에는 코로나19까지 겹쳐서 120여 년 만의 최저인 마이너스 6%대의 성장을 보인 것도 이러한 부정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 부정적 이미지만으로 중남미 전체를 경시해서는 결코 안 되며 그곳의 잠재력과 미래 기회요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일부 국가들의 면면만 봐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충분하다. 중남미 최대 영토와 인구, 경제규모를 가진 브라질을 보자. 1인당 GDP만 보면 2020년 6,800$로 개도국이지만, 이 나라는 세계수준의 중소형 항공기 생산국으로 ‘엠브라에르’사는 세계4위의 상업용 항공기 생산실적을 자랑한다. 다국적 자동차기업이 대부분 진출하여 자동차산업이 발달해 있고 에탄올과 바이오디젤 등 신재생에너지 생산도 많다. 게다가 세계적인 농산물 수출국이기도 하다. 필자는 2013년에 공무출장으로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경제개발을 막 시작했던 1962년에 자국출신 기술진이 건설했다는 행정수도 브라질리아 시내의 우수성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브라질의 잠재력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멕시코의 잠재력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기성세대들은 젊었을 때 봤던 서부영화에서 맨날 멕시코인들이 미국 총잡이들에게 당했던 인상이 남아서인지 이 나라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멕시코는 지정학적 위치, 우수한 인적자원, 경쟁력 있는 임금수준 등 3박자를 갖추고 있는데다 과거 NAFTA를 대체한 자유무역협정 USMCA가 2020년 7월 발효되어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핫(hot)한 글로벌 제조거점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산업은 생산 세계5위, 수출 4위로 우리나라를 앞서고 OECD에도 우리보다 2년 먼저 가입할 정도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다.

중남미는 전통적으로 무역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효자 시장이다. 1990년 이후 지금까지 우리와의 교역규모가 11배 증가했고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가 줄곧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다만 2020년엔 코로나19로 인한 현지 경제침체로 우리 수출이 26%나 줄어들어 소폭의 무역적자를 보였고, 2021년엔 수출이 큰 폭으로 늘어났음에도 수입도 함께 늘어나 무역적자가 지속되었다. 코로나19가 진정되어 중남미 경제가 안정되면 우리와의 교역관계도 정상궤도를 찾지 않을까 생각된다.

2022년은 우리나라가 멕시코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등 주요 중남미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은 지 환갑(60주년)을 맞는 해이다. 브라질(63년) 페루(59년)를 제외한 대다수 중남미 국가들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이 계기를 활용해서 우리는 올해를 ‘중남미와의 경제협력 도약의 해’로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비록 여전한 코로나19와 일부 중남미국가의 경제사회 불안 등 위기요인이 있지만 기회요인이 훨씬 크다. 현재 8개국과 FTA 관계에 이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MERCOSUR, 에콰도르, 태평양동맹과의 협상도 끝나면 중남미는 우리나라의 최대 FTA네트워크 지역이 되어 다른 경쟁국들보다 유리한 경제협력 인프라를 갖게 된다. 게다가 우리에겐 경쟁국들에게는 없는 ‘한류’라는 무기가 있다. 중남미에는 600개가 넘는 한류 동호회가 활동하고 있고 한류 범위도 K-팝에서 이젠 영화 드라마 음식 화장품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우리 속담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라는 말이 있다. 수교 60주년을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최근 중남미가 글로벌 제조허브로 발돋움하고 있는 상황과 현지에서의 한류 확산 등의 이점을 잘 결합해서 중남미가 더 이상 유망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주력시장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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